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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May 08. 2024

지리산 둘레길 19코스-2

우리가 걸으면서 나누는


타인능해(他人能解) - 배고픈 사람은 누구라도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라고 쓴 쌀독이 운조루 대문 밖에 서 있다. 아무나 열어도 좋다는 저 말은 얼마나 다부지고 선하냐. 내가 가진 구례에 대한 인상은 두 가지다. 그 두 가지가 하나로 엮어지는 신기를 목격했던 어느 해를 아직 기억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넓어지는 시야, 여기가 어디냐는 물음이 저절로 터져났던 날이다. 탄성 같은 물음은 사람을 확 끌어당긴다. 곧바로 가던 길을 잊고 구례를 돌아다녔다. 구례 읍내에서 천은사로, 천은사에서 화개까지 달렸던 날은 하늘이 맑았던가, 바람이 불었던가. 그리고 언젠가 오미에서 들었던 여기가 하늘에서 금가락지가 떨어진 명당자리라는 이야기. 그제야 뚫리는 명쾌함이 있었다. 하늘에서 보는 것처럼 땅을 살피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땅을 걷는 이치, 거기에 풍수가 있겠구나.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구례를 거닐 때는 그 마음으로 채운다. 누구든지- 他人, 하늘이다 - 能解.

세상에 머무는 동안 어떤 이는 풀고 어떤 이는 얽어맨다. 풀 것을 풀고 묶을 것은 묶는 것이 이치다. 하지만 풀 것을 묶고, 묶을 것을 푸는 사람이 있고 풀 것도 풀지 못하고 묶을 것도 묶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어느 쪽에 머무는 사람인지 스스로 묻게 하는 여기가 명당이다.

농사도 손으로 짓고 밥도 손으로 짓는다. 사람을 살리던 그 밥을 생각한다. 사람을 살리는 생각이 모락모락 김을 내고 밥이 되는 땅, 여기가 명당이다. 금환락지金環落地에서 내가 쓰는 글이 쌀이 되고 밥이 되기를 소망한다. 구례를 지날 때면 늘 그 마음에 설렌다. 나를 풀어줄 그를 찾는다. 나를 열고서 내 안에 든 것이 멀리, 널리 날아간다면 나는 또한 가벼워서 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경계는 그 어디쯤인 것을 구례는 상기시킨다. 그래서 여기가 명당이다.

스무 걸음만 떼면 운조루가 보이는 곳에 차를 멈추고 부대원 4명이 내렸다. 저 무공의 달인들, 복장은 허술하고 눈빛은 아직 동트지 않은 새벽어둠 속을 거니는 듯 힘이 없다. 기꺼이 힘을 숨기는 그대들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군사들인가. 오미에 왔다. 곡전재*와 운조루가 바로 근처에 있는 선한 기운이 가득 고여 있는 지점에 섰다. 손바닥에 침을 뱉어 방향을 보았다. 오미에서 난동으로 가는 둘레길은 구례 들판을 휘돌아 나간다. 거리는 19km가 되지만 평지라서 걷기에 많이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남쪽으로 화살표가 나 있다. 서쪽을 가리키는 화살표는 12. 4km짜리 오미에서 방광으로 가는 길이다. 어린 군사 둘을 먼저 주의시켰다. 웃지 마라, 어린 군사들아. 그래도 웃는다. 방광이 어떻다고 그러냐. 그래도 웃는다. 방광이 무슨 잘못이냐. 그래도 웃는다. 자꾸 방광, 방광, 그러니까 더 웃긴다며 방광, 방광 그러지 말라면서 웃는다. 나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어쩌란 말이냐. 거기가 방광인 것을.

방광放光은 빛을 쏟아내는 곳이다. 여기는 온통 내어주는 양지다. 풀어주고 놓아주는 것을 발견했다. 오, 신비여. 구름에 가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군사들의 기세를 드높일 절호의 기회다. 봐라, 오늘을! 하늘도 우리의 수고를 돕는구나. 우리가 흘릴 땀을 미리 씻어 준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땅에 대고 그림을 그렸다. 군사 셋이 머리를 조아리며 내 그림을 내려다본다. 타인능해에서 방광으로 간다. 너희는 숨은 뜻을 알겠느냐. 우리는 해解에서 방放으로 풀어주고 놓아주러 간다. 우리는 오늘 해방이 된다. 어떠냐, 와룡 제갈량도 울고 가지 않겠냐! 우리의 전진을 저 비구름에게 맡기지 말자, 우리의 해방은 우리 손으로, 어떠냐! 군사여.

멀뚱거리는 저 게슴츠레한 눈빛이야말로 내가 믿을 그것이다. 너희 중에 가장 약한 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내게 해준 것이라는 약속과 사명을 두 어깨에 얹고 빛나게 걷기로 했다. 우리 어린 군사들은 숫자로 계산을 하는 데 뛰어나다. 생각할 것도 없이 12km짜리 이 길을 샀다.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방광 다음에 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길이 원 둘레길인 것이다. 지난해 늦가을에 걸었던 하동읍에서 서당, 그 코스와 흡사하게 여기도 오미에서 난동 코스를 곁들인 셈이다. 아마도 근처 풍경이 아까운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걸어보라고 애써 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나그네의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가 없어서, 프로스트의 심정을 먼 이국땅에서 헤아려 본다. 나그네도 다 못 가는 길이다. 하물며 작전 임무를 수행 중인 우리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을까. 오늘 못 간 길은 다른 날에 걷기로 한다. 그때는 한결 해방된(?) 너와 나로 만나기로 한다.

왜 비는 내리지 않을까. 어째서 걸음은 가벼울까. 모처럼이라면 모처럼이고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인데 척척 맞아가는 이 모양새는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여기, 수수만 년 아름다운 곳. 노래를 불렀다. 가능한 등산객처럼 행동했다.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이면 안 된다. 우리가 작전 중인 것을 들키면 안 된다. 비구름이 잔뜩 내려앉은 날, 풀숲을 헤치며 노래를 부르며 나아갔다. 넷이서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걸었다. 사람들이 전혀 낌새를 치지 못했다. 차들이 지나치는 도로도 건넜다. 우리는 특공대인데···· 힝.

그러다가 만난 민간인, 아니 등산객들. 마침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서 헐떡이던 숨을 고르고 있던 참이다. 그동안의 산행으로 날다람쥐 같던 어린 부대원들이 중간고사로 인해 심각한 체력 저하에 빠진 것이다. 방심하고 있었다. 별안간 눈앞에 나타난 3인조, 아니 세 사람은 어딘가 특별해 보였다. 이렇게 궂은 날씨에 산에서 내려오다니, 그것도 여자 셋이서. 가만히 그들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침을 꿀꺽, 우리 부대원들은 반대쪽 하늘로 시선을 뒀다. 그렇지, 어떤 상황에서도 얼굴이 노출되면 안 된다. 역시 기본에 충실한 군사가 실전에서 실수가 없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사방으로 노출된 곳에서 역시 쉬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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