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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May 29. 2024

웃음

오래 쓰는 육아일기


마실길 처음 걸었던 날을 떠올리며 그날의 여정을 고쳐 썼다. 단어 몇 개만 남고 모두 바뀌었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불과 5년 전에 썼던 글이, 이렇게 형편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 정도다. 그렇다고 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대로 남겨두고 다른 칸에 날짜와 제목만 가져오고 다시 썼다. 또 세월이 흐른 뒤에 그 두 개의 글을 보게 되면 무슨 생각이 들까.

그날 찍었던 사진을 보며 특히 강이에게 눈길이 머물렀다. 내가 좋아하는 표정, 내가 공손해지는 표정으로 아이가 웃고 있었다. 나는 잘 웃는 사람 앞에서 얌전하고 편안하고 너그러워진다. 잘 웃는, 그 말이 어떤 말인지 나는 아무래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몇 해 전에 강원도를 찾았었다. 한 번은 겨울에 한 번은 여름에, 두 번 다 원통을 지나 설악산으로 가지 않고 천도리로 향했다. 절대 잊을 일 없는 천도리, 거기서 군 생활을 했다. 거기에서 한참을 더 들어가면 민간인 통제선이 나오고 거기서 또 얼마를 걸어야 부대에 도착했던가. 다시 찾아간 첫 겨울에는 아직 그 자리에 부대가 있었는데 두 번째 찾아간 여름에는 그 부대마저 떠나고 없었다. 빈 건물만 철문이 잠긴 채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말이지, 악 소리를 내며 함성을 지르던 수많은 군인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저 연병장에서 뛰고 훈련받고 그랬었는데, 박격포 훈련하던 화기 중대, 나란히 기관총이 놓여 있고 하나, 둘, 셋 구령을 붙이며 훈련하던 군인들, 깃발을 들고 흔들던 기수들, 하얀 도복을 입고 맨발에 태권도를 하던 사람들, 행군 출발 전 완전 무장을 하고 지휘관 훈시를 듣고 서 있던 긴장감들····.

그 시절에 그렇게 음악이 듣고 싶었다. 어떤 선생님이 요즘 이현세 외인 구단 이야기를 하시던데, '편지만 쓰게 해 줬어도' 나도 여전히 그 말이 기억난다. 까치가 무인도에서 지옥훈련을 받으며 엄지를 어떤 마음으로 그리워했는지, 그녀가 얼마나 보고 싶은 사람이었는지, 편지만 쓰게 해 줬어도···· 어린 나이에도 그 말이 오래 여운을 남겼다. 유재하가 부르는 노래들, 김광석이 부르는 노래들이 참 많이도 어른거렸다. 새벽 탄약고 앞을 지키고 서 있으면서 별이 어찌나 초롱거렸던지, 가만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것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어떤 때는 그 노래들이 그 자리에서 듣고 싶어서 절망감까지 들더라는 것을 스물두 살에 알았다.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그렇게 시작하는 노래들을 듣고 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인 것을 알았다.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얼마나 좋은 이야기며 멜로디냐.

천도리에 성당이 하나 있었다. 이름도 천도리 성당. 군 생활 동안 딱 하나 좋았던 기억을 뽑아달라고 그러면 무엇을 말해줄까. 유격, 폭파, 행군, 그런 훈련을 받는 동안에도 나는 혼자 있고 싶었다. 전투 체육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떼로 몰려서 공을 차고 공을 차다가 사람을 차고 사람을 차다가 지면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감정이 어수선해지면 여길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몰라서 끙끙댔다. 말이 턱 막히는 날에 5분 대기조가 발동되면 욕이 나온다. 정말, 지랄 같구나. 전방에 5초간 함성 발사, 그 5초 간이 좋았다. 훈련이나 행군, 일상 내무 생활에서도 다들 말이 없어지는 구간이 있다. 그 구간이 좋았다. 지쳐서 서로 상관하지 못할 때 혼자서 딴생각을 하는 것이 좋았다. 편지를 쓸 수 있어서, 그렇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 데서나 끄적거렸던 시절이어서 좋았다. 거짓말같이 새벽하늘을 보며 시를 썼다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돌아보면 좋은 것들이 많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나도 뜬금없이 오늘 아침 그러고 있다.

이런 것이 화해라는 감정일 것이다. 시대와의 화해, 시절과의 화해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제는 고참이라고 불렀던 사람들도 그만 잊을까 보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창고 콘크리트 바닥의 차가웠던 느낌을 이제 놓아줄까 싶다.

한 달 조금 더 지나면 입대 일 년이 될 무렵 부대를 걸어 나갔다. 위병소를 나가는 모습을 매일 상상했었는데 나 혼자서 아무도 없이 나섰다. 새가 이런 맛에 하늘을 날겠구나. 연어가 이런 재미로 바다까지 헤엄치겠구나. 내가 좋으면 다른 것들도 다 좋아 보인다. 마음이 천국이고 지옥이라는 말, 맞다. 정기 휴가나 포상 휴가를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게 대대장님이 나를 찾았다. 너, 천주교지? 네. 너, 부활절 미사에 참석하고 싶지? 네. 연대 본부 옆에 사단 성당 있는 거 알지? 네. 거기 일주일 가라. 네가 우리 대대 군종이라고 하고. 네?

군대는 그 자리에서 결정되는 것들이 많다. 미리 계획하거나 준비하는 일에 서툰 집단이었다. 적어도 라떼는!

그 부활절 1주일간 성당 사제관에서 다른 군종 두 명과 함께 그러니까 군종 3명에 신부님 한 분, 넷이서 지냈다. 수도원이나 신학교에 가본 적 없어서 비교는 할 수 없지만 꼭 그런 곳에 있는 기분이었다. 거기에서도 별이 선명했고 볕도 따뜻했다. 무엇보다도 조용했다. 구보도 함성도 집합도 아무것도 없었다. 기도하고 청소하고 식사하고 장식하고 그때도 무엇인가를 썼다. 그것을 타자로 치고 연대본부에 가서 복사도 하고 그렇게 부활절 팸플릿도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 일주일이 내가 뽑은 좋았던 기억이 된다. 눈이 내렸다고 하면 드라마 많이 봤군요, 그러겠지만 눈이 내렸다. 가늘게 흩날리는 눈을 마당 가운데에서 맞고 서 있었다.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그 틈으로 뾰족한 성당 꼭대기도 보였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니까 그 일주일이 좋았다는 것은 알겠고, 잠시 얼굴이 떠오를까 싶어 눈을 감는다. 사제관에 들어선 첫날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사제관은 가끔씩 들렀던 경험이 있어서 낯설지 않았는데 잠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제관 벽에 신부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까만 수단에 로만칼라 복장을 한 사제가 아니라 군복을 입은 앳된 젊은이였다. 사제가 되기 전 군대 시절 사진이었다. 이등병, 나는 모자에 작대기 하나가 그어진 그 이등병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어떻게 저렇게 웃고 있지. 한순간도 군대 와서 지금껏 한순간도 웃은 거 같지 않은데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웃었을까. 웃음이 종교 같았다. 나는 그 순간을 환상처럼 기억하고 있다. 그 뒤로 나는 여전히 구타를 당하고 훈련을 뛰고 심심하고 담담했지만 사진 속 그 웃음이 늘 생각이 났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많이 뒤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웃음이 나지는 않았지만 웃고는 싶었다. 혼자서 웃어보곤 했다. 이렇게 웃었던가, 이렇게 했던가 그러면서 웃었다.

강이가 4학년 때 웃었던 사진을 보면서 저 힘이 살게 했구나, 그랬구나. 어머니가 강이 웃는 거 보면 하루가 다 행복하다던 그 말씀이 비로소 무슨 말인지 알았다. 내가 오래오래 간직하고 있을 웃음이다. 더 외로울 때 꺼내 보며 내가 웃을 웃음인 것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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