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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25. 2024

비록 맨발이

2021.1031


쌍재에 오르면서 비로소 몸이 부드러워졌다. 물기가 솟았다. 촉촉한 아침 기운이 들숨과 날숨을 타고 내 속을 흘렀다. 오르고 올랐는데 맑아지다니, 이런 상승은 기대 밖의 성과다. 체력이 따로 좋아진 것도 아닌데 무조건 단풍으로 향해가는 초록, 초록 다음으로 보이는 - 초록이 품고 있는 계절감 또는 가을 빛 - 것들이 반가웠다. 이런 것이 엔도르핀 같은 것인가. 고급스러운 창가에서 살짝 건배를 하고 싶은 것은 무슨 조화지? 이 창은 넓다. 하늘이 넓은 곳에 나와버렸다. 10월이 그대로 다 보이는 하늘 아래서 나는 싱그러워졌다.

쌍재를 지나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도 손에 꼽는 고동재 위에 섰다. 내가 그랬지, 여기는 꿈에 나오더라고!

애썼다. 수고했다, 꼬맹이들아.

수고로운 것들이 근사한 것을 이룬다. 여기에서 바라보는 산들을 너희도 나처럼 보고 싶어 할까. 저 아래에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날을 하루씩 다 보고 싶은 나는 눈 감을밖에. 살면서 마주치는 풍경들이 내 삶인 것을 오랫동안 미안해 하고 즐거워하며 잠시 다 잊었다. 잘 잊혀야 할 것을 마음먹는다. 감정은 불쑥거리더라도 마음은 결을 잃지 않기를 고동재 위에서 빌었다.

맨발로 걷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비록 맨발이 뭔지 잘 모르지만 마음이 저절로 신을 벗었다. 믿음이든 신념이든 사람을 올바르게 이끌 수는 있지만 그것이 꼭 깊어지고 넓어지는 길은 아닐 것이다. 하나로 모든 것을 푸는 것보다 모든 것으로 하나를 들여다 보는 어리석은 신비를 나는 구한다. 작은 돌들이 내 발 아래에서 나를 받치고 있다. 높은 곳에서 걷는 맨발은 뜻밖에도 조화로웠다. 나는 뜻밖이라 말하지만 원래 그러는 거라고 꼭 일러주는 듯했다. 짧았지만 그것으로 됐다. 산에서 신을 벗고 맨발이 되어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희는 나를 특이하게 바라봐라. 아니 좀 더 이상야릇한 것도 좋다. 저것은 양귀비꽃인가 궁금해하는 그런 시선도 바람직하다. 틈으로 부는 바람소리가 먼 옛날 - 오늘 같은 날 -을 떠올리게 하거든 그때에라도 맨발이 되어보라고 고동재를 내려오면서 빌었다. 여기를 이렇게 걷던 사람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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