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과 오른손 위로 볕이 앉습니다.
막 점심을 마친 사람이 사다리에 올라 허공을 만지는 사이
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람이나 꽃이나 나나 눈뜨고 당한 것입니다.
그윽했던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꽃이 피고 있고 또 필 것입니다.
벚꽃은 어떻습니까.
카지이 모토지로 梶井基次郎의 짧은 소설, ´벚꽃나무 아래´는 봄의 미학을 노래합니다.
잘 돌던 팽이가 완전히 멈추어 버리는 것처럼, 가슴 뛰는 연주에는 무엇인가 환각 같은 게,
사람 마음에 던지는 두근거림, 낭만이라고 하는 환장할 것 같은 것들을 벚꽃잎 한 장 한 장에 새겨놓습니다.
그 꽃잎들이 지는 것을 바라봅니다.
벚나무 아래에는 시체가 묻혀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환상이 세상에 흩날릴 수는 없다고 씁니다.
여기에서 ´시체´는 혐오스러운 대상이 아닙니다.
살인 사건을 연상하시면 곤란합니다.
가장 거룩한 밑거름 그것은 ´나´ 아닌가 싶습니다.
희생이나 제물을 떠올리면 교훈적이거나 종교적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자연인으로서 ´나´만 이 순간 필요합니다.
내가 피운 꽃을 바라보는 환희는 천당보다 달콤할지도 모릅니다.
겨울은 봄입니다.
그것은 하나입니다.
봄이 겨울을 품었는지 겨울이 봄을 키웠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꽃이 땅 밑에 모든 것들로 나고 다시 땅 밑의 모든 것으로 돌아가는 봄날이 환할 뿐입니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요한 5:24
순하고 환한 것들은 어둡지 않던 것들이 없습니다.
곱게 어두웠던 것들이 따사롭습니다.
자식은 어미나 아비보다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도 그런 것일 겁니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 30
봄이 오고 꽃이 피고 자식이 자라는 일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 뜻이었으면 합니다.
다만 소원 같은 것이 있다면 그 꽃이 아름답기를.
그마저도 기도할밖에 없다는 기도를 잊지 않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