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산 공기가 축축한 기운에 섞여 노랗고 붉은 벚나무 이파리를 적시는 아침입니다.
토요일인지 모르는 저 울긋불긋한 표정들이 곧 깨어날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이 났다던 그리스 신화를 읽어주면 스르르 문이 열리듯 산이 기지개를 켤 것 같습니다.
빛과 죽음 그리고 잠은 모두 밤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한 걸음에 하나씩 떨어뜨립니다.
파네스와 타나토스, 히프노스의 이름을 익숙한 듯 건네면 모과나무가 바짝 다가설 것입니다.
죽음의 신과 잠의 신은 쌍둥이 형제였대, 역시 흥미로운 것은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온몸의 감각이 돌기 시작합니다.
나무가 일어나고 숲이 깨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쓰다 말고 잠시 멈춥니다. 멈췄다가 프란츠 카프카의 말로 손을 씻고 세수를 합니다.
´일상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이다. ´
다시 무엇이라도 만들어볼까 싶어집니다. 복음 말씀을 볶아볼까 싶어집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아침 숲 속에 어울리게 변주해 봅니다. 변주 變奏는 마음속에 있는 누군가를 위하는 연주입니다.
특별한 마당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양파, 파프리카, 애호박, 그리고 색이 마음에 드는 대파를 얇고 가늘게 썰어둡니다.
아이들이 아이들이었을 때 계란 오믈렛을 만드는 내 변주는 더 살살거렸습니다. 감쪽같이 숨겨놓고 먹도록 하는 스킬을 연마했습니다. 아이들이 아이들이었을 때, 계란만 먹은 것이 아니라 야채도 잘 먹었다는 것을 단풍이 짙어가는 곳에서 찾아냈습니다. 골동품으로 쓰기에는 아직 미숙해도 나 하나쯤은 웃음 나게 하는 소품이 되었습니다.
비울수록 채워지는 그 말을 어떻게 옮겨 심을까 고민하는 것은 사람들의 일 같습니다.
산에 있는 소나무는 그 자리가 제 자리입니다. 자기 자리가 어울리면 천 년이라는 세월도 구름처럼 살아갑니다.
나무가 보고 싶으면 산에 찾아가는 것이 옳습니다. 찾아가는 것이 애정이니까요. 애정은 구하면서 찾으려 하지 않는 심보를 막무가내라고 부르는 듯합니다. 비울수록 채워진다는 말이 그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4:11
부모는 자식에게 다 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채를 먹었으면 싶은 것입니다.
백종원 씨는 사업이 잘되지 않을 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단 한 장면으로 충분했습니다.
"아니, 싫어하는데 파를 이렇게 큼지막하게 썰어서 내주면 어떡해요?
잘게 썰어도 돼요, 아니면 파 향만 나게 해도 상관없어요."
마음은 마음을 얻고 사람을 얻은 사람은 오래가기 마련입니다.
낮추고 비운다는 것의 첫걸음은 시선의 높이를 상대에게 맞추는 것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거, 해본 사람은 물 마시는 일처럼 쉬운 일인데 그래 본 적 없다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연습 중입니다.
이파리들이 빛을 맞이하는 것을 잘 보기 위해서 연습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토요일이라고 일러줘야겠습니다. 까르르 그 소리가 들리면 여기가 거기인 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