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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an 10. 2023

기도 90-1

반 통의 물

2023,0110,  화요일



어제 너무 일찍 깬 바람에 오늘은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불만은 없습니다. 하나 더 나간 만큼 하나 덜 들여놓았다고 여기면 그만입니다. 그럴 수 있어서 홀가분합니다. 나가고 나가고 또 나가는 일이 나에게는 없기를 바랍니다. 나갔으면 들어오고, 나갔다가 들어오고, 나갔으니까 들어오는 그 반복이 차라리 내 윤회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어제도 살고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사는 일이 생을 여러 번 옮겨 살아야 하는, 벗어날 수 없는 수레바퀴가 아니라, 그때마다 1회, 단발로 끝나는 하루살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말하자면 파도와 같이 말입니다. 일어났고 사라졌다. 일어났고 사라졌다. 파도는 일어나면 사라졌다. 파도는 늘 있으면서 없습니다. 없으면서도 파도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부는 하나의 파도입니다. 그것이 해탈 아닐까 싶습니다. 끊지 않고 이어서 이어서 이어서 완성되는 일, 하지만 그마저도 부분이 되는 일. 바다이면서 파도가 되고 파도이면서 또 바다가 되는 그런 일 말입니다. 우주는 파도가 되고 우주에 파도가 칩니다. 나는 파도가 되고 내 안에 파도가 칩니다. 나는 그때 누구입니까.






¶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


마음이여, 몸은 낡은 신발, 뒤집어 신고 날아보시지


- 당대의 몸값은 신발값과 같으니


당대의 몸이 헤고 닳아, 참으로 연한 뱃가죽 보이누나


- 이성복, 「사랑일기」 부분




파도가 신고 다니는 신발, 내 낡은 신발을 나는 아껴서 잠에서 깹니다. 그리고 그대를 향해 또 적습니다.


허튼소리로 또한 서툰 글자로 연한 뱃가죽과 주름진 등거죽을 헤실헤실 흔들면서 ´그렇잖아요´라고 인사합니다.


헤물러서 몇 자 적은 것도 오래 데리고 다니다가 시든 꽃 바라보듯 숲 가까운 곳에 던져놓습니다. 너는 한번 웃어나 봤던가 생각합니다. 고창에는 눈이 얼마나 왔을까 뜬금없이 그쪽을 바라봅니다.




어제는 문득 아이들에게 고마운 것이 솔솔 돋았습니다. 마음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내 피부, 살갗에서 오돌토돌 생겨났습니다.


5학년 짜리가 왜 저를 보고 웃냐고 웃는 것부터 고등학교 2학년 아이가 무엇을 선택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웃는 것까지 내내 나를 돌봐줬습니다. 나는 저희들로 살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어른을 살리는 아이들인 줄 까맣게 몰랐던 것이 어제는 파도 속에서 살짝 몸을 드러내는 섬 같았습니다.




나의 사소한 일들, 내가 물인 것을 깨우쳐 주는 물방울들, 나는 저희들의 사소한 일이 기꺼이 되고 그들의 물방울이 되어서 좋다 할까 싶습니다. 우리 그렇게 거창해지지 말고 바다가 되기로 하자. 하나도 구분되지 않는 바다, 하나도 선명하지 않은 바다. 바다는 물을 따지지 않고 흐르지 않아도 바다. 그것이 내가 바라던 바다.




¶ 그러나 그들의 사소해 보이는 하루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기도 하다. "한 시간은 한 시간이 아니다. 향기와 소리와 계획, 분위기로 가득 찬 화병이다."라고 한 프루스트의 말처럼, 그들의 한 시간 또는 하루 속에는 연표할 수 없는 삶의 신비와 진실들이 피어나고 있다. 때로는 향기롭게, 때로는 악취를 풍기면서, 삶의 화병 속에 꽂힌 채 그들은 어떤 언어로도 어떤 숫자로도 설명될 수 없는 꽃을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부지런히 부지런히. - 나희덕 산문집 「반 통의 물」, 160p






그들이 나였음을, 내가 그들이었음에, 끄덕이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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