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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Oct 13. 2019

적당한 온도

권태로운 적정 온도


그녀는 유독 감정에  ON, OFF 가 잘 안 되는 사람이었다. 똑딱이 스위치처럼 단 번에 켜고 끌 수 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녀의 스위치는 유독 뻑뻑했다. 가볍고 쉬운 마음이 제일 어려웠다. 마음먹은 대로 따라주지 않는 게 감정이었고, 자신이 컨트롤하기 가장 어려운 존재가 감정이었다. 그럴 때면 감정을 분해하고 분해해서 아주 작은 단위로 쪼개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감정을 조각내는 일 자체가 힘겨웠다. 그렇다 보니 무언가에 감정적으로 빠져드는 일을 극도로 경계했다. 최대한 감정 소모가 적은 일에만 몰두했다. 이성이 지배하기 쉽고 결과가 보장되는 그런 일들 말이다.


그런 반복되는 과정들 속에서 그녀가 내린 결정은 하나였다. 스위치를 누르는 일이 힘겹다면, 애초에 스위치를 누를 일을 만들지 말 것. 말랑 말랑한 감정이 노크를 해 올 때면, 차가우리만치 칼같이 밀어냈다. 필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고, 손톱에 찔린 손바닥에서 피가 난다 해도 꼭 쥐고 있어야 했다. 그러면 꽤 많은 시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견뎌내는 것에 무뎌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마음이 방심한 틈을 타, 스위치가 켜지는 날에는, 억지로 콘센트에 박힌 전기코드를 뽑았다. 물기 잔뜩 머금은 손으로 겁도 없이, 무자비하게 뽑았다. 그렇게 이삼일 정도 어둠에 갇혀 열병을 앓다 보면 너무 밝아 눈이 부시던 전구가 깜빡이는 날이 왔다. 때때로 깜빡이는 전구가 끈질기게 괴롭혀 겹겹이 쌓이고 억눌러온 감정이 터져버릴 때면, 미뤄왔던 드라마를 보거나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그리고 늦은 새벽까지 걸었다. 어둡고 캄캄한 밤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뻑뻑한 스위치가 제멋대로 고장이 났는지 또다시 힘겨운 싸움을 걸어왔다. 아무리 실력 좋은 수리공이 와도 고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지내고 있어.”

“불안하고 위태롭게, 공허함에 허덕이다가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고, 그러다 결국 상처 받고, 해소되지 않은 또 다른 갈증을 느끼고, 긴 밤과 치열하게 싸우며. 그렇게 지내고 있었어. 그러면서 벗어나려고 무던히도 애쓰며 지내는 중이기도 하고.”

“그래 그거면 됐어.”


무언의 기다림. 그녀에겐 충분한 위로였다. 섣부른 위로는 소용없었다. 그녀는 마음에도 온도가 있듯,  시간에도 온도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침의 시간은 살을 찢어질듯한 아주 차가운 영하의 온도였고, 어느 날 오후의 시간은 매서운 바람에도 뜨드미지근한 미풍이 느껴지는 영상의 온도였다. 그리고 어느 날 밤의 시간은 눈물로도 꺼지지 않는, 끓는점을 넘다 못해 흘러넘치는 열기 가득한 온도였다. 그래서 사랑과 이별, 열정과 권태 그 모든 것들 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온도가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게 당연했다.


몇 날 며칠, 지겹고 무수한 시간의 온도를 반복하고 나서야 그녀의 시간에도 적정 온도가 찾아왔다. 더 이상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일정 온도를 유지한 채, 식지도 끓지도 않는 그런 상태. 서서히 경계가 희미해지고 느슨해지는 일련의 과정. 몹시 지난하고 치열했지만 예상했던 결과였다. 아주 잠시 현재로부터 떨어져 나와 심리적 억겁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제자리를 찾을 온도였다. 뜨거운 건 식는다. 아픔과 슬픔도 마찬가지다. 기억이라는 잔여물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지긋지긋 하지만, 흐려질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전에 없던 사랑을 쏟고, 누군가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누군가를 향해 정체모를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것 모두, 어떤 자극에 의해 변화하는 온도에 불과했다. 추위에 떨기도 하고, 화상을 입기도 하며 그렇게 적정 온도를 찾아가는 거다. 흉 진 자리가 볼품없을지라도, 나의 전체가 볼품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녀는 처음으로 스스로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볼까 했다. 이제는 제법, 어떤 온도도 그럭저럭 힘겹지 않게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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