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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Apr 07. 2021

현재의 기억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

나는 상담을 받습니다.

"스스로를 너무 통제하려고 하지 말아요. 류화씨에게는 그 통제가 스스로를 더 고통스럽게 할 거예요."


요 몇 달간 나의 감정 상태는 굉장히 평온해 보인 듯했다. 하지만 이것은 평온이라기보다는 극도의 무기력과 차분함에 가까웠다. 자주 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이 떠나가도록 울어버리면 심장 밑바닥에 있는 한 방울의 눈물까지 모조리 꺼낼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이런 무거운 감정이 말라버릴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끝이 없는 사슬에 묶여 질질 끌려가는 삶이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생각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내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어 나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은걸 꾸역꾸역 참아낸다. 나는 티 내지 않기 위해 애쓰고 이겨낸다. 오늘도 난 하루를 버텨낸다. 


"오랜만이에요. 2주 만인가요. 그동안 어땠어요? 평소보다 조금 차분해 보이는데."

그의 인사로 시작되는 상담.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목적 없는 이야기를 쏟아낸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아주 깊은 과거를 끄집어내야 하는 길고 긴 이야기다. 단순한 이유를 갖다 붙이고 싶을 만큼, 해결하기 고된 그런 결핍이다. 


"힘든 2주였어요."

"어떤 것 때문에 힘들었나요?"

"음... 그냥 머리가 복잡했어요. 길을 잃은 것 같다고나 할까요."

"긿을 잃었다라.."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의 많은 모습 중 선택적으로 어느 한 부분의 모습만 보여주곤 해요. 필요에 의해서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거죠."

"그건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텐데요."

"맞아요. 누구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저는 그 갭 차이가 굉장히 커요. 공적으로 아는 사람과 사적으로 아는 사람이 생각하는 저의 이미지가 마치 끝과 끝에서 서있다고나 할까요. 완전히 정반대죠. 그래서 가끔은 스스로가 너무 소름 끼친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어떤 식으로 다른가요?"


그렇다. 사실 나는 그렇게 긍정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강하지도, 쿨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이것은 선과 악의 공존 일수고 있고, 이성과 감성의 공존일 수도 있으며, 나는 그 안에서 매일 같이 싸움을 벌인다. 많은 이들과의 관계의 시작은 내 연극에서부터 시작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물론 이 또한 완벽히 거짓된 연극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그 가면에 잡아먹혔다. 나의 가면이 벗겨지고 100%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 내 심연의 어둠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이들은 놀라 도망치곤 했다. 이제 막 마음을 열기 시작한 나에게 적당한 변명과 이유를 대기 시작했고,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내동댕이 쳤다. 반복된 경험은 사람을 겁쟁이로 만든다. 결국 나는 절대 나의 전부를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나는 철저히 만들어진 모습만 보여준다. 그들의 눈에 나는 때로는 완벽하고 때로는, 때로는 밝고, 때로는 차가운 이미지로 투영된다. 해석은 그들의 몫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그들과 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존재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의 공적인 모습에 매력을 느껴서 다가와요. 하지만  하나 둘 관계가 깊어지게 되면 몰랐던 모습들이 보이기 마련이잖아요. 스스로 컨트롤하기 전에 뿜어져 나오는 것들이라고나 할까요. 그때부터는 상대를 믿고 마음을 열어 저의 모습을 100% 다 보여주게 돼요. 한없이 밝은 모습부터 꽁꽁 숨겨두었던 어둡고 부정적인 그런 모습들까지 모조리 다요. 저는 사람을 믿는 게 오래 걸리는 만큼 한번  내 사람이다 싶으면 더 이상 재고 따지지 않거든요. 하지만 그 결말은 언제나 비극이었죠. 그들은 처음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어요. 이해할 수 없다, 혹은 감당할 수 없다며 저를 떠났죠."

"큰 상처였겠어요."

"저는 일 할 때만큼은 정말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거든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아요. 제가 맞다 싶은 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에요. 어떻게 보면 신념이 강한 거일 지도 모르겠어요. 근데 사적인 인간 이류화는 전혀 그렇지 못해요. 늘 불안해하고 전전긍긍하고 주위 시선에 눈치를 보죠. 그럴 때면 내가 나를 단숨에 잃어버리는 기분.... 그런 기분이에요.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저는 저를 잘 다듬고 보기에 좋은 모습으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한 편으로는 그게 편하기도 해요. 상처 따위 받지 않아도 되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살아가는 거죠. 모든 관계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저는 그래서 제가 무서워요. 제가 저를 믿지 못하겠거든요."

"그렇게 지내면 힘들지 않아요?"

"힘들어요. 그런데 더 크게 힘들지 않기 위한 방법이에요. 뭐랄까. 스스로의 감정을 참고 참으며 살아가다 보면, 무뎌지게 되잖아요. 물론, 지금은 그 부작용으로 이곳에 있지만요."

"위태로웠을 것 같아요."

"맞아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을 계속해서 쌓아가는 기분이었죠. 혼자 있는 시간에는 처절하게 무너졌어요. 그 시간은 언제나 고통이었죠. 하지만 제가 선택한 일이라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러웠어요."


'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분명 내가 살아가는 인생인데 일정 부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진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일임에도 어딘가 모르게 부대꼈다. 갈등과 조화 속에서 불균형을 이루는 기분. 나는 나를 끊임없이 세공해 나갔고, 그것은 더 큰 악순환을 낳았다. 철저히 통제된 채로 살아가는 인생은 스스로를 옥죄었다. 이것은 저 밑바닥에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기반된 것이었으며 나는 분명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외면하고 싶었다. 아니,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부정하고 싶은 양가감정을 느꼈다. 이것은 아주 깊은 딜레마가 되었으며, 나는 내가 만든 틀 속에서 서서히 곪아가고 있었다.


"그럼 언제부터 그런 감정을 느꼈나요?"

"잘 모르겠어요. 어려워요."


"그럼...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요?"


나의 기억은 조작된 것일까. 내가 만든 환상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끝나지 않는 꿈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진짜일까. 이것은 어떤 흔적으로 남아있는 걸까.


나는 그것을 찾는 여정을 떠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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