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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Apr 08. 2021

어둠, 태초의 기억이 되는 것

"그래요. 류화 씨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요?"


오늘은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완벽해 보이는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결핍은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드러난다. 주로 이성 관계에서 가장 많이 표출되곤 하는데. 이것은 크게는 불신이라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 불신은 나의 의지와를 상관없이 아주 강력한 방어기제를 탄생시킨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차근차근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하면 돼요."

"저는 사람에 잘 못 믿겠어요. 무서워요. 정확히는 인간의 마음을 불신하죠. 마음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알면서 증오해요."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어요?"

"......... 왜 제 관계들은 항상 실패로 끝나는 것 같을까요?"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하다 시간을 거슬러 아주 오랜 과거로 걸어 들어갔다. 타인과의 관계가 개인의 영역으로 침범하는 순간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누군가의 마음을 받기 전에 의심하고, 밀어낸다. 나는 도망치기 바쁘다. 언제부터인가 나에겐 아주 큰 벽이 생겨났다. 누구나 그렇듯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내 불신의 출발점을 썩 유쾌하지 못하다.


"왜 그런 것 같아요? 혹시 과거에 어떤 기억이나 경험이 있나요?"


기억이나 경험.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선명한 기억. 이것은 충격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추억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은 트라우마 일까? 나는 아직 그 길에 묶여있다.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 서툴고 미성숙했던 시절의 사랑은 그만큼 열정적이었고, 영혼과 육체를 모두 바쳐 아깝지 않을 정도라 믿었다. 나의 모든 처음을 지배했던 사랑은 그렇게 나의 자아를 만들어 갔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의 형태가 같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서로가 애정과 외로움에 허덕였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이 달랐다. 나는 그에게 사랑을 갈구했고 그는 그 사랑을 다른 이에게 갈구했다. 이 다름은 매 순간 나를 불안에 떨게 했다. 극도의 불안은 사람을 아주 쉽게 피폐해지게 만든다. 그는 언제나 타인과의 사랑을 정당화하며 당연한 듯 나에게 이해를 바랐다.  그는 다시는 씻을 수 없는 칼날 같은 말들을 내뱉었고, 내 영혼은 서서히 지쳐갔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아닌 오직 그를 향한 나의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이 마저도 영원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사랑인지 집착인지 미련인지 경계가 흐려질 때쯤 4년간의 사랑은 종지부를 맺었다. 나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처절했고 한 편으로는 미련했으며 그것은 아주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 당시 저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죠. 그러면서도 해야 하는 일들을 악착같이 해냈어요. 주변에서 독한 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을 놓아버린 거예요. 위험한 시도를 한거죠. 그런데 중요한 건 기억이 나질 않았어요. 그 순간 무서워지더라고요. 아-이대로는 정말 큰일 나겠구나."

"그 후로 어떻게 지냈어요."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을 믿고 싶은 나의 믿음을 부정하고 싶었다. 닥치는 대로 사람을 만났다. 마음이 채 닿기 전에 끝을 냈고, 내가 선택한 것은 오로지 순간의 쾌락 그뿐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 끝에는 거대한 공허함이 덮쳐왔다. 세상을 향한, 사람은 향한 분노와 증오로 얼룩져 갔다.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악에 바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다. 이것은 괴물일까. 만들어진 것일까. 혹은 원래부터 나는 괴물이었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마냥 온몸에 거추장스러운 치장품을 두르고 다니는 그런 일상이 지속됐다. 그러다, 아주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해서는 안될 선택을 했다. 눈을 떠보니 나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황량한 길 위였고, 이미 내 정신은 증발한 지 오래였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과 후회와 온갖 쓰레기 같은 감정들이 덮쳐왔다. 나는 세상이 떠나갈 듯 울었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였던 그때, 어쩌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애써 거부하던 그때. 처음으로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했고, 다른 의미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렇게, 어둠의 터널에서 치열하게 싸움을 하며 빛을 향해 발을 내딛고 있었다.


"저번에 이야기했던 그 사건 말이죠? 유일하게 후회한다고 했던."

"네. 맞아요. 스스로의 망가짐을 가장 증오했을 때였어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런 사건이 있고 몇 달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꽤나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 어쩌면 정신을 차렸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무언의 발악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한번 깊이 각인된 과거의 기억은,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모든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사람에 대한 불신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만들어냈다. 무의식으로 모든 것에 심리적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극 소수에게만 드러냈으며, 혼자 있는 시간 이외에는 최대한 표출하지 않으려 애썼다. 두려움은 돌덩이가 되어 내면에 아주 깊게 각인되었다.  나는 사람이 무서웠다. 누군가 내 마음에 노크를 해 올 때마다 불안했다. 원치 않은 기억들이 떠올랐고, 그것은 먼 미래까지 이어졌다. 나의 마음이 무서웠다.  


매 순간 요동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감정이 최대한 배제된,  내가 투자한 만큼 확실한 결과물을 가져다주는 무언가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닥치는 대로 쉬지 않고 움직였다. 새로운 것들을 배웠고, 모든 시간을 아주 빽빽하게 여러 일들로 채워 넣었다. 내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 이외에는 거 뜰 떠 보지 않았다. 괜찮다는 합리화와 함께 그럴듯하게 삶을 꾸며갔고, 자아가 상처 받지 않도록 끊임없이 삶을 정당화시켰다. 나에게 타인과의 관계를 그저 허울만 가득한 사치품이었을 뿐이다.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관계들로 이루어진 삶. 감정보다 이성이 지배하는 삶.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힘들게 이야기 마치고 머리가 아파왔다. 눈물을 닦아낸 휴지들이 한가득 쌓여있는 책상 위를 한참을 응시했다.


"이야기하고 나니까 어때요?"

"속상해요. 그때의 제가 가여워요.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가슴이 답답해요. "

"이야기를 듣고 나니 류화씨가 왜 이렇게 일에 매달렸는지 이해가 돼요. "


어둠, 태초의 기억이 되는 것은 나를 어떻게 만들어질까.

그 깊은 어둠에서 나는 과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망각의 힘이 이다지도 약한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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