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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Oct 04. 2018

고도를 기다리는 방법

볼리비아 : 수크레


오늘은 모험을 떠나볼까 했다. 위험하고, 스릴 넘치는 그런 모험 말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드넓은 초원을 하염없이 거니는 지루하고 고독한 그런 모험을 말이다.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텅 빈 침대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내 북적이던 숙소엔 제 길을 찾아 떠난 여행자들의 온기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지난밤 울렁이는 속을 움켜쥐고 애써 잠자리에 들었다. 어젯밤 기억 속의 잔상은 현란하게 춤을 추는 보름달과 흔들리는 알파벳이 전부였다. 아마도 나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던 것 같다. 아주 아주 긴 밤이었다.  

라파즈를 지나 수크레에 온 지 5일째. 한 곳에 오래 머물다 보니 누군가를 맞이하고 떠나보내는 게 익숙해진 일상이다. 이곳에서는 대부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하루 종일 테라스에 앉아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고, 그러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러 나가고, 소화를 시킬 겸 거리 거닐다 숙소로 들어와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잠자리에 들었다.

 

낮 2시, 숙소의 야외 테라스는 온전히 나만의 공간으로 변하는 시간.

어떠한 파동도 없이 잔잔한 일상의 연속.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시키는 듯한 의미 없이 반복되는 상황들의 나열.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 채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왜냐면 그날은 여느 날과 같이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처럼 눈이 떠졌으니까. 자칫하면 재미없고 외롭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상이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유쾌했다.

저무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불어오는 바람에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구름 위에 앉으면 어떤 기분일까? 폭신폭신할까?' 하는 그런 쓸데없는 상상들. 큭큭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불안감과 걱정에 사로 잡혀 신호등 켜지듯 마음에 빨간불이 들어오곤 했다.

‘시간을 이렇게 헛되게 쓰면 안 돼.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해!’ 다시 위험천만한 모험의 길로 뛰어드려는 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이런 의미 없는 상념들의 끝은 결국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에스트라공이  말했다. "디디, 우린 늘 이렇게 뭔가를 찾아내는 거야. 그래서 살아있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 거지."


돌이켜보면 나의 상념은 그저 살아있음을 느끼게해주는 차가운 아이스크림같은거였다.


때론 목적 없는 모험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낭만에 젖어 거리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도, 따스한 햇살에 스르르 낮잠에 들어 달과 별이 뒤엉킨 저녁을 맞이하는 것도. 모든 것은 저마다의 힘이 있었다. 모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나는 매일매일 아주 다양한 모험이 가득한 길 위에 있었다. 아픔, 고통, 상실, 고뇌. 때론 사랑, 기쁨, 행복. 그리고 지루함과 고독이라는 아주 쓸쓸한 테마의 모험까지.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었다.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난 오늘 이 긴 하루를 헛되게 보낸 건 아니야. 그래서 오늘의 일과도 이제 다 끝나간다는 걸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지.”


수크레의 거리는 고요하다. 사색하기 아주 딱 좋은 곳이다.


느지막이 밖으로 나가 근처 상점에서 맥주 한 캔과 바로 앞 빵집에서 레몬 파이 하나를 사 왔다. 오늘 저녁은 영화 한 편과 함께 노을을 맞이할 예정이다.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모든 삶 자체가 모험을 의미한다. 삶을 사랑할수록 모험도 더 많아진다.


삶이 이렇다면 나는 내 삶을 격렬히 사랑하고 있다. 방금 먹다 남은 레몬파이까지도.


수크레의 숨겨진 전망대, 산펠리페네리


에스트라공이 물었다. ”내일도 고도씨를 기다리러 이 버드나무 밑에 와야 할까?”

“응 와야 해.” 하고 블라디미르가 답했다.


아마 나는 내일도 오늘과 같이 노트북을 들고 테라스에 앉아 영화를 볼 것이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상큼한 레몬파이 대신 아주 달달한 초코머핀을 먹을 예정이라는 것.



*참고 도서 : 고도를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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