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 생각해 봤음직한 각 개인의 신념에 관련된 이야기는 그 자체가 인간의 역사이고 흔적이다. 소싯적 학교에서 세계사를 배우던 때, '십자군 전쟁'은 글쓴이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선사하였다. 사랑과 헌신의 상징인 십자가 기를 들고, 무려 361년 동안 전쟁을 쉬지 않고 이어왔다는 그 사실이 첫 번째 충격이었고, 두 번째는 모순된 그들의 신념 때문이었다. 불교는 자비, 그리스도교는 사랑이 그들의 대표적인 교리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사랑대신에 사랑을 빙자한 칼과 창을 들고 무자비한 전쟁을 어찌도 그리 오랫동안 할 수 있었던 걸까? 아무리 아름답게 미화하여도 이것은 명분을 빙자한 세력 확장 전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신념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수백, 수천, 수만 명을 단체로 무엇에라도 씐 것처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그런 힘이 신념이라는 이 녀석에게는 있다. 가스라이팅의 신이 있다면, 신념이 그 자리를 독식해도 무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나쁜 신념이 있다면, 좋은 신념도 반드시 존재한다. 선악을 구별할 수 있고,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념은 자신이 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선악의 구분이 모호하고, 사리분별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면, 그릇된 신념을 가짐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궁지에 몰려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내가 믿고 보는 것만이 다 옳고 맞다면, 이 세상은 단 하나의 진리 대신에 79억 5천만 개의 각기 다른 진리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세상이겠는가? 보편적 상식 없이 너도 나도, 서로 자기만 옳다고 우겨대면서 서로 싸우고 헐뜯는 그 세상이. 너무나도 허황된 이야기 같겠지만, 실제로 우리들의 인간 사회에서는 신념과 이기로 인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매 순간 발생하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부터 종교적, 정치적, 지역적 비극에 이르기까지.
타인의 신념을 강요받는 것은 언제나 고달프고 힘겨운 일일 것이다. 잘못된 신념을 옹호하며 옳다고 치부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도대체 무슨 영문이길래 저러시고 계시는 걸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상식을 벗어난 타인의 언행들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이상하다. 식견이 낮다고 무시할 일은 아니지만, 그 식견의 낮음으로 인하여 잘못된 믿음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는 것은 본인의 인생을 잘못된 길로 안내하는 자충수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재미있는 부분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아무리 옳은 말로 설명을 해주어도, 그들 대부분은 그 옳은 말을 일절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인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편식의 심화는 그들을 점점 고립시키고 이러한 고립화는 그들에게 남아있던 일말의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예민성을 극대화시킨다. 분명 골고루 잘 먹어야 좋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텐데, 기묘한 신념은 영양 잡힌 다양한 지식의 섭취를 방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차단한다.
결국 옳은 신념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 옳은지 볼 수 있는 혜안을 길러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력이 필요할 것이며,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 그리고 현상을 올바르게 통찰할 수 있는 통찰력도 겸비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능력들은 각종 서적이나 미디어등을 통해서 배울 수 있겠지만, 옳지 못한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요즘 같은 시대에서는 자칫 잘못 발을 내딛는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릴 수도 있다. 옳은 선택이란, 나의 입맛에 맞는 선택이 아닌, 나의 구미에 맞지 않더라도 상식선에서 옳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일컫는다. 잘못돼 보이는 신념을 가진 분들을 보면 맹목적인 경향이 짙은데, 무조건적인 것에는 항상 말썽거리도 함께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 절대적인 옳고 그름은 존재하기 힘들지만, 상식적인 옳고 그름은 제법 존재함을 위안으로 삼아야겠다.
자기 합리화는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편안함은 신념을 망각하게 해 주고, 불편함은 신념을 공고히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