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한 쳇바퀴는 멈출 수 있는 스위치가 없다. 한번 올라타게 되면, 쓸모가 덜해지거나 죽어야지만 내려올 수 있는 그런 쳇바퀴가 있다면 당당하게 올라갈 자신이 있는가? 자신이 있건 없건, 생존을 위해서라면, 자의와 상관없이 그 공포의 쳇바퀴에 올라타야만 한다. 사실, 우리가 태어나게 되는 그 시점부터, 우리는 이미 그 쳇바퀴 위에 올라타고 있지만 그 위에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들은 다양한 환경과 지원 속에서 각기 분수에 맞는, 혹은, 분수가 차고 넘치는 방법 등으로 기나긴 인생 마라톤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현시대에 가장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인정받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은 어떠한가? 우리들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무형의 거대한 사상과 체제 아래에서 무엇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지, 그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정확한 해답도 얻지 못한 채, 단지, 세상의 흐름에 등 떠밀리듯, 아주 자연스럽게 사회가 원하는 방향대로 우리 또한 흘러가게 된다.
아주 원론적인 질문이지만,
우리는 왜 교육받아야만 하는가?
왜 법을 지켜야만 하는가?
우리는 왜 생산인구가 되어야만 하는가?
왜 세금을 내야만 하는 걸까?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들이지만, 명확한 해답은 없다. 그저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깐, 혹은, 해야 한다고 명시가 되어 있기 때문에, 또는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라는 큰 조직에 소속된 조직원이 되기 위해서 한국이라는 국가는 국민들에게 몇 가지 의무 사항을 권고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4가지 의무가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국토방위의 의무이다.
큰 테두리에서 본다면, 우리네들의 인생은 이미 어느 정도 확정된 삶일 수밖에 없다. 교육을 받아야 하고, 노동을 해야만 하며, 국가의 예산을 충당해줘야만 하고, 국가가 필요로 할 때 그 필요성을 채워줘야만 하는 그런 삶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각 개인의 역량이나 성취에 따라 다양한 산업의 역군으로서 길러지고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는 개별적인 선택적 자유와 결정이 허용된다. 이러한 선택적 자유와 결정의 공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교육 지원의 정도는 향후 생산인구가 될 아이에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해 줄 경쟁력을 높여준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공동체의 운명을 함께 짊어질 목적으로 양육된다. 생산자는 생산을 하고, 소비자는 소비를 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편리하게 나 대신 내가 필요로 하는 생산품을 생산하여 준 다양한 생산자들에게 감사드리며, 그 값을 기꺼이 지불한다. 농산물부터 공산품까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인간 세계의 네트워크는 서로에 대한 필요성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되어 왔다.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먹고살기 위함이 제일 크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그곳에서 안주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큰 굴레는 돌고, 돌고, 또 돌면서 계속 순환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각 단계에서 발생되는 수많은 양의 엔트로피는 다양한 변수를 생성시키게 되는데, 일련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인플레이션이라는 거대한 거품은 노동자들을 다시 노동 시장으로 내보내는데 혁혁한 역할을 한다. 노동을 추가적으로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달까?
아무튼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이러한 잔잔한 외압들은 우리들이 생존 쳇바퀴를 계속 돌리게끔 만드는 여러 가지 장치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세금이라는 것도 어찌 보면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삥을 뜯는 행위인데, 그 각종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은 노동을 해야만 한다. 이렇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자의보다 타의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직군의 많은 노동자들이 항상 월요병 증후군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