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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유 Sep 08. 2021

감정은 쓰고, 읽으면 사라진다

정말 생지옥이 따로 없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약(호르몬제)을 먹어도 좋아지는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도 없게 되었나 싶어 불안하고 두렵다.      


2020년 3월 16일에 적은 일기의 한 부분이다. 그 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루에 고작 3~4시간밖에 못 자는 날들이 몇 주씩 이어지면서 마음은 둘째 치고 체력적 한계를 여실히 느끼던 터였다. 그대로 가면 곧 쓰러질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던 때 의사 선생님이 ‘잘 지냈느냐?’는 질문이 꾹꾹 누르고 있던 감정을 건드렸다. ‘너무 힘들다’고 대답하니 선생님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뭐가 그리 힘드냐?’고 물었고, 난 ‘생지옥이 따로 없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하며 울었다. 

난 어지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게 사랑하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조금 눈물이 나왔을 뿐, 그 외에는 언제 울었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그랬던 내가 울컥 감정이 올라와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면서 그동안 내가 참 힘들었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20년 가까이 책을 만들면서 참 많은 분야를 접했다. 그 중에는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책도 몇 권 있었다. 마음은 곧 감정이다. 일반적으로 행복, 기쁨, 평온함 등의 긍정적인 감정은 몸과 마음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반면 우울, 분노, 화, 슬픔 등의 부정적인 감정은 마음을 아프게 하고 몸까지 힘들게 하기 때문에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껏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면 어떻게든 빨리 털어버리려고 노력했다. 감정이란 게 묘해서 그냥 두면 점점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더 그렇다. 우울하면 이상하게 우울한 생각이 더 많이 나서 결과적으로 더 우울해지고,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화가 난 것은 아니었는데, 화를 내다보면 점점 더 화가 치미는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을 해봤을 것이다. 그래서 부정적인 감정을 오래 쌓아두면 안 되고, 수다를 떨든, 노래를 부르든, 명상을 하든 자기에게 맞는 방법으로 빨리 털어버려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 의해 부정적인 감정이 자꾸 올라올 경우, 그 상황이 해결되지 않으면 지금 당장은 애써 감정을 잊어도 금방 또 감정이 올라올 수 있다. 불면 초기에는 불안하거나 짜증이 날 때 의식적으로 ‘아냐 괜찮아. 금방 좋아질 거야’를 주문처럼 반복하며 감정을 달랬다. 아마 감정을 달랬다기보다는 감정을 외면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기도 하다. 

불면이 심해지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는 빈도도 잦아지고, 강도도 세졌다. 밝고 긍정적이었던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던 상황 자체가 해결이 안 되니 아무리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도 우울함과 불안함, 짜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내 마음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떨쳐버리려고 애를 쓸수록 감정은 찰거머리처럼 딱 붙어 나를 괴롭혔다. 


사실 감정은 무조건 밀어내면 안 된다. ‘마음챙김’이라는 주제로 책을 만들 때 감정이 올라올 때 충분히 알아차려 주면 자연스럽게 소멸된다는 내용을 접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면 알아차려주기보다는 밀어내려 했으니 감정이 더 성이 나서 증폭되었으리라. 

감정을 알아차려주는 데도 글쓰기가 효과적이다. 솔직하게 그 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글을 쓰면 내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다. 감정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그 감정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제3자가 보듯이 감정을 객관화시켜 보는 것이라고 들었다. 감정을 글로 쓰는 순간 감정은 속에 담겨 있을 때보다 훨씬 객관화된다. 뿐만 아니라 어떤 감정인지 좀더 구체화되고 명확해진다. 

때로는 글이 격해질 때도 있다. 나도 ‘정말 생지옥이 따로 없다’라는 극한 표현까지 썼지만 상관없지 않은가. 남들이 보면 위태롭고 걱정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때는 그런 표현을 할 정도로 힘들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니 솔직하게 감정을 담아내고, ‘아 내가 너무 힘들구나’, ‘내가 지금 많이 우울해하고 있구나’ 인정해주면 된다. 누군가에게 섭섭한 감정을 느꼈다면 그 또한 써도 괜찮다. 전후좌우를 따져보면 섭섭할 이유가 전혀 없어도 감정이 그렇다면 그 감정을 알아주어야 한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날그날의 감정을 글로 쓰면서 조금은 편안해졌다. 불안하고, 우울하고 짜증스럽고 화나는 감정을 글로 쓰다 보면 자기 연민에 빠져 더 서러워질 때도 있었지만 계속 쓰다 보면 요동치던 마음이 잠잠해졌다. 오랫동안 글을 쓰고 수정하는 일을 했으면서도 글이 가진 힘이 얼마나 큰지 몰랐다. 몸과 마음이 지독히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글쓰기가 풍전 밑의 등화처럼 위태로운 마음을 잡아줄 수 있음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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