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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유 Oct 08. 2021

아닌 척 감정을 속이는 것이 더 위험하다

지금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지만 꽤 오래 무명의 시간을 인내해야 했던 아이돌 그룹이 있다. 바로 ‘EXID’이다. ‘위아래’라는 노래가 팬이 찍은 직캠 덕분에 역주행을 하면서 자칫 수많은 아이돌 그룹이 그렇듯이 있었는지도 모르다 사라질 수도 있었던 그룹이 그야말로 기사회생한 것이다. 

EXID의 멤버 중 ‘하니’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많아야 나이가 20대 초반인 어린 소녀들이 불확실한 미래를 견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불안하고 우울했을 텐데, EXID 멤버들은 묵시적으로 ‘안 좋은 이야기나 내색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겉으로 드러내면 십중팔구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전염되기 때문이었다고. 그래서 불안해도 밝게 웃으며 불안하지 않은 척, 우울하지 않은 척 했다고 한다. 

하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반은 공감했고, 반은 걱정했다. 감정이 전염되는 것은 맞다. 우울한 사람 곁에 있으면 덩달아 우울해지고, 밝고 명랑한 사람 옆에 있으면 그 기운이 나에게도 전해져 기분이 좋아진다. 여러 명의 멤버가 함께 생활하니 서로를 힘들게 하는 감정 표현은 하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은 아닌 척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속으로 들어가 마음을 병들게 할 수도 있어 하니는 웃으면서 이야기하는데도 왠지 마음이 짠했다.      


사실 어느 정도까지 내 감정을 허용해야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EXID의 경우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해도 내색하지 않고 ‘우리는 할 수 있어. 지금은 힘들지만 분명 잘 될 거야’라고 의지를 불태우며 서로를 격려했을 것이다. 그런 긍정적인 생각이 불안한 감정을 잊게 했을 수도 있다. 

나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양방병원, 한의원, 남편과 지인들 모두 ‘매사에 감사하며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 또한 그들의 조언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우울함이 밀려오면 ‘아니야.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 남편 착하지, 딸도 예쁘고 알아서 자기 일 똑 부러지게 하지,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돈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단지 잠만 못잘 뿐, 난 정말 가진 게 많다’라고 생각하며 우울함을 부인했다.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었다. 뇌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억지로 웃어도 뇌는 진짜 웃는 것으로 착각해 웃을 때 나오는 기분이 좋아지는 호르몬을 분비한다. 그러니 우울한 감정을 모른 척하고 웃으며 ‘난 괜찮다. 난 괜찮다’ 말하면 정말 괜찮아지기도 한다. 

매일 내 감정과 씨름했다. 부정적인 감정을 인정하는 순간, 간신히 버텨오던 내가 무너질까봐 안간힘을 쓰며 ‘아닌 척’, ‘괜찮은 척’ 했다. 가족들은 물론 가까운 지인들에게 허물어지는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더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내 감정을 인정하지 않고 아닌 척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더 외로워졌다. 우울하고 불안한데, 입 밖으로 꺼내면 더 우울하고 불안해질까 두려워 내 감정을 외면했다. 

그러다 어느 날 ‘굳이 힘든데, 안 힘든 척 할 필요가 있나?’ 의문이 들었다. 잠을 못 자면 몸이 피곤하고, 몸이 피곤하면 마음까지 우울해지는 것 당연한 것 아닌가. 아무 이유도 없이 우울해하고 불안해한다면 문제지만 나한테는 명확한 원인이 있다. 그러니 그냥 내가 힘든 것 당연하다 생각하고 그런 나를 위로해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돌아보면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이 있었던 것 같다. 밝고, 씩씩하고, 긍정적이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나를 좋아하다 보니, 우울하거나 부정적인 내 모습은 나조차도 낯설었다. 그래서 내 감정을 더 엄격히 통제해 부정적인 감정들을 쉽게 인정하지 못했는데, 그게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몸이 힘드니 안간힘을 쓰며 내 감정을 통제하려 해도 계속 감정이 올라와 나를 무너뜨렸고, 그런 나에게 실망하고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생각을 바꿨다. 어느 누구라도 나 같은 상황에서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우울하고 불안할 수 없다고 나를 다독였다. 힘든 건 너무 당연하다고. 내가 약해서 우울하고 불안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감정을 불러온 것이라 생각하니 그토록 싫어했던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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