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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건이 아닌 너희라는 존재 자체로, 아빠는 행복해

네 번째 편지

by 나귀

아빠가 너희들과 함께 처음 아프리카 땅을 밟았을 때, 모든 게 서툴렀어.


길 하나, 대화 한마디, 장을 보는 일까지 모든 게 모험처럼 느껴졌지. 그중에서도 가장 큰 모험은 집을 구하는 일이었어. 그나마 우리가 살 만한 집을 고르고 고르다가, 철물점 위 3층에 있는 집 앞에 섰을 때는 잠시 마음이 놓였어.


하얗게 칠해진 벽, 정돈된 타일,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 증축한 집이라 깨끗해 보였거든. 그런데 그때는 몰랐어. 아프리카의 무자비한 더위와 3층이라는 높이, 그리고 환기가 되지 않는 구조가 어떤 조합을 만들어낼지 말이야.








그 집에서 며칠 살아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어. 그 집은 사실 거대한 찜통이었다는 걸. 태양이 정수리 위에 걸리면, 열기는 거침없이 벽을 타고 내려와 우리 집을 감싸 안았어. 낮이면 숨이 턱 막혔고, 밤이면 낮에 차 오른 열기가 집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지.


에어컨? 전기세가 너무 비싸서 오래 켤 수도 없었어. 그래서 선풍기를 돌리며 더위를 버텼지만, 그 바람조차 뜨거웠어. 창문을 활짝 열어도 공기는 습하고 답답했고. 집 안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었어.


더욱 절망적인 건 물이었어. 3층까지 오르는 수압은 늘 약했고, 그마저도 하루가 멀다 하고 단수가 이어졌어. 샤워는 사치였고, 손을 씻는 일조차 쉽지 않았어. 변기 물 내리지 못하는 게 제일 곤욕이었고, 빨래는 말할 것도 없었지.


새벽 2시쯤, 간헐적으로 물이 나오는 순간을 붙잡아 세탁기를 돌렸는데, 그것도 물이 나와야 가능한 일이었어. 물줄기가 흐르다 끊기면, 젖은 빨래는 그대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지.








그런 날들 속에서 너희를 보는 아빠 마음은 정말 복잡했어.


팬티 하나만 입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데도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너희를 보면서, '나 때문에 아이들이 고생을 하나' 하는 죄책감 비슷한 것들이 밀려왔어. 그때 너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팬티를 갈아입고, 몸에 물을 적시며 견뎌왔었지.


아빠도 너희가 잘 알다시피, 더위에 참 약한 사람이잖아. 에어컨 온도가 1도만 높아져도 금세 불편해지고, 차갑게 식은 냉장고 물 한 잔이 없으면 답답해. 그래서 그런 무더위 속에서 너희가 땀에 절어 다니는 걸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더 불편했던 것 같아. 내가 감당하기 힘든 더위인데, 너희는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싶어서 말이지.




어느 날, 정전이 된 집에서 엄마와 함께 너희 곁을 지키던 밤이 생각난다.

바람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선풍기마저 멈춘 방 안은 숨이 막히도록 뜨거웠어. 그때 엄마와 나는 작은 부채를 하나씩 들고 너희 곁에서 바람을 일으켰지. 땀에 절어 있는 너희 이마와 뺨에 조금이라도 시원한 기운이 닿기를 바라며. 너희라도 편히 자라고..


그렇게 부채질을 하다 문득 엄마와 눈이 마주칠 때, 우린 말없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어. 환경은 너무 힘들었지만, 너희가 곤히 잠든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거든.


그때를 떠올려보니, 마음에 와닿는 생각이 있어.




행복은 환경이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걸.




아빠는 늘 조건이 갖춰져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시원한 에어컨 바람, 언제든 쓸 수 있는 풍족한 물, 시원한 날씨.. 그런 것들이 있어야만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해질 거라 믿었지. 그런데 너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와르르 부서졌어.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도,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아빠를 지탱해 준 건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너희였거든. 너희의 존재 자체가 아빠에게는 힘이었어.


너희가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빠는 찜통더위를 버틸 이유를 찾을 수 있었고, 또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어. 너희가 잠든 채 내던 숨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어. 그것은 지친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노래였고, 답답한 공기를 단숨에 식혀 주는 바람이었지.








결국 행복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거 같아.


그 더운 아프리카에서, 전기와 물이 없어 답답한 밤에도, 너희가 거기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빠는 버틸 수 있었어. 힘들고 지친 하루 끝에도 “아빠~”하고 달려와 안기는 그 품이 아빠를 다시 일으켜 세웠거든.


그때도 그랬듯이, 지금도, 앞으로도 그건 결코 변하지 않을 거야. 세월이 흘러 어떤 것이 바뀌더라도, 너희라는 존재 자체는 언제나 엄마 아빠의 마음을 붙들어 주는 가장 든든한 힘이야.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상황이 좋든 나쁘든, 아빠는 너희가 있는 것만으로도 가장 행복해.



이 더위 속에서도 어떤 조건이 아닌,

너희라는 존재 자체로 아빠는 행복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너희 때문에 행복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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