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편지
마치 세상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진 것처럼 무겁게 집에 들어섰지.
그런데 그 순간, 너희가 갑자기 음악을 크게 틀더니 두 눈을 반짝이며 외쳤어.
"아빠도 같이 춤춰요!"
아빠는 처음엔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지.
"아빠, 지금 춤출 기분이 아니야."
정말 그랬거든. 그날의 피곤과 무거운 생각들 때문에 조금도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너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잡아끌고,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보며 포기하지 않았어. 그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아빠도 어깨를 들썩이고 발을 슬쩍 굴리며, 춤 흉내 같은 몸짓을 해봤지.
처음에는 어색하고 민망하기만 했는데, 리듬을 따라 한 발씩 옮기다 보니 어느새 입가에 웃음이 번지고, 나중엔 아빠가 소리를 지르며 신나게 춤(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무언가)을 추고 있더라. 어깨가 풀리고, 굳어 있던 얼굴도 조금씩 풀리면서 모처럼 너희와 함께 웃었어.
와.. 그런데 그게 뭐라고, 참 신기하더라. 그 순간, 모든 걱정이 다 날아가버리는 것 같았어. 게다가 너희들과 춤추며 놀다 보니 문제를 이길 힘이 아빠 안에 샘솟는 것 같았어.
사실 아빠도 어릴 적을 떠올려보면 하루하루가 재미있었던 거 같아. 매일 놀았으니까. 해가 저물어 어둑해질 때까지 동네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달리고 숨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쓰러질 듯 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그런데 언제부턴가 마음이 바뀌었지.
'놀 시간은 없어. 쉰다는 게 무슨 소리야?
시간을 줄여서 일을 해야 해'
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자리 잡기 시작했어. 해야 할 공부, 쌓이는 일, 이루어야 할 성공이라는 이름의 짐이 점점 무겁게 어깨를 누르면서, 쉼은 점점 뒷전이 되고 말았지. 웃음 대신 근심이, 장난 대신 계산이 자리를 차지해 버린 거야.
너희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야. 책임감에 눌려 웃을 틈조차 잃어버리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걸.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그런 무게에 지쳐 하루를 버티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지 몰라. 공부가 뜻대로 되지 않아 머리를 싸매는 날도 있을 거고, 가까운 친구와 다투어 마음이 쓸쓸해지는 날도 있겠지. 간절히 품은 꿈이 예상치 못한 벽에 가로막히는 것 같은 순간도 맞닥뜨리게 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빠의 이 편지를 떠올려줘.
힘들 땐 잠시 다 내려놓고 놀아!
좋아하는 노래에 맞춰 엉망진창 춤을 춰도 좋고,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웃음을 터뜨려도 좋아.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 모양을 맞춰보는 것도 괜찮고, 이유 없이 그냥 바다에 가서 물장구를 쳐도 좋아. 그 짧은 순간만큼은 모든 걱정과 짐을 벗어던져보는 거야.
가만 보면 놀이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쉼의 또 다른 단어 같아. 닫혀 있던 마음을 환기시켜 주고, 오래 쌓여 답답하던 공기가 한순간에 빠져나가게 되지. 그리고 그 자리에 맑고 선선한 바람이 스며들어 온몸을 채워주는 걸 경험하게 될 거야.
아빠도 가만히 돌아보면, 왜 그렇게 굳은 얼굴로 지낸 날이 많았을까 싶어. 마치 늘 뭔가를 증명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긴장을 풀지 못한 채 살아왔던 거지. 돌아보면 조금 더 웃어도 괜찮았고, 조금 더 느슨해져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야. 그렇게 살았더라면 어쩌면 더 따뜻한 하루들을 많이 간직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
그래서 아빠는 너희가 언젠가 어른이 되면, 무엇보다도 잘 놀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 책임을 회피하라는 말이 아니야.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 해야 할 일을 잘 감당하면서도, 그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노래를 흥얼거릴 여유가 있고, 함께 어깨를 들썩이며 춤출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아?! 그리고 이건 조금 이른 말일 수도 있는데,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꼭 이런 사람을 만나면 좋겠어. 세상의 무게가 두 어깨를 짓누를 때, 함께 웃으며 손을 잡고 춤출 수 있는 사람. 멋지지 않니? 그런 사람과 함께라면, 힘들 때도 언제나 다시 노래할 수 있고, 어떤 하루라도 춤추듯 지나갈 수 있을 거야.
아빠는 그런 엄마랑 만나서 얼마나 행복한지.. 너희도 잘 알지? 하하;;
그리고 혹시 힘들어서 도무지 버틸 수 없는 날이 오면??
그땐 다 내려놓고 아빠랑 놀자!
어설픈 춤을 추며, 허무맹랑한 농담을 던지며 아빠랑 같이 웃고 뛰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짐이 잠시 사라질 거야. 그리고 다시 일어설 힘이 생겨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