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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tdaal May 23. 2023

잡채 축소주의

narrative_recipe : 잡채 그 잡채

'주의'라는 개념에 있어서 꽤 불편함을 느끼는 건, 그 단어를 사용할 때 나 자신을 그 성형틀 안에 가두려고 하는 힘이 생기기 때문일 거야. 비단 채식주의자나 비건 같은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나의 가치와 방식을 어떤 한 단어로 규정짓는다는 건 자신에게뿐 아니라 상대에게도 불편함을 줄 수 있어. 그러한 이유로 난 보통 '좋아해' 혹은 '편해'라는 표현을 즐기지.


'나는 재료 자체를 먹는 걸 좋아해.'

'단순하면 편해.'


예전에는 내가 인정받은 교수나 되어야 누굴 가르칠 수 있고, 등단한 작가나 되어야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었거든. 하지만 자신의 철학이 있다면 주위에 알려줄 수 있고, 할 말이 있다면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언젠가 알아버렸어.


요리도 그래. 마법 같은 비법소스와, 진귀한 재료, 그리고 멋진 칼질과 미세한 감각이 있어야 '요리'라고 부를 만한 행위가 된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내가 믿는, 그리고 따르는 기준 (그걸 철학이라고 부를게)이 있다면, 그리고 식재료를 먹기 좋게 다룰 수 있다면 그걸 요리라고 부를 수 있어.


그런 면에 있어서 나의 작은 믿음은 '단순함'이야.


우엉과 연근을 심심하지만 쫀쫀하게 조림을 만들면 현미밥과 함께 근사한 짝이 되지.
좋아하다 보니 자꾸 하게 되고, 자꾸 하다 보니 하나씩 둘씩 과정이 생략되고, 때로는 맛이 없지만 괜찮아.


프랑스에서는 어렸을 때 한 가지 식재료, 예를 들면 '당근', 만 한동안 먹인다고 해. 그러면 아이가 당근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고 또 다른 재료가 뒤따르는 거지. 프랑스에서 결혼해서 아이를 키운 친구의 이야기인데 이게 일반적인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리가 있어 보여.


몇 개 안 되는 재료로 단순하게 조리된 음식은 재료만 좋으면 (좋은 재료에 대한 기준은 제각각이겠지만, 나는 제철의 신선한 재료라고 생각해.) 슈퍼에서 산 캔에 든 소스를 부어서 끓인 '맛있는 음식' 보다 '맛'을 느낄 수 있어.


내게는 콩나물국이 그렇고, 버섯을 넣은 솥밥이 그래. 찐 채소가 그렇고 가볍게 간장으로 볶아낸 롱빈이 그래. 연두부에 낫또를 올려 먹는 아침이 그렇고 김에 싸 먹는 현미밥이 그래.




그런 내가 잡채를 했다는 건 놀라운 일일까?


김밥과 잡채는 손이 많이 가서 소풍이나 잔치처럼 특별한 날에 큰 마음을 먹어야 만들게 돼. 하지만 만드는 사람에겐 초상집인 그럼 음식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만들 때마다 과정이 간소화되면서 나의 레시피가 생기더라.





전날 밤 잠들기 전 물에 담가놓은 당면과 건표고.

여러 가지 식감과 향을 갖은 버섯들.

냉장고 속 자투리 채소들.


미리 소스를 만들어 놓지 않고 조리 중에 하나 둘 꺼내서 넣다 보면 팬에서는 이미 재료들이 타고 있더라. 진간장을 넣고 조금 더 진한 색이 맛있어 보이니까 dark soy sauce도 약간. 맛술과 코코넛설탕까지 한데 섞어두어. 기름에 불려 두었던 당면과 채소를 한데 볶다가 채소의 기분이 말랑말랑해지면 소스를 부어. 살살 달래듯 볶다가 이제 먹음직한 색이 나오면 불을 끄고 들기름과 들깨로 마무리.


보들보들한 면이 아니지만 냉장고에 넣었다가 먹을 만큼씩 꺼내 팬에 볶아 먹으면 새로 한 듯한 식감으로 두고두고 먹을 수 있지. 잡채 그 잡채. 이걸 벌써 몇 끼나 먹었나 모르겠어.


잡채의 이름은 '잡'은 마치 '잡탕', '잡다하다'처럼 아무거나 넣어서 아무렇게 만든 꽤 무질서한 음식이라는 인상을 주지. 온갖 '기본재료'들을 따로 볶아서 넣으면 사실 형형색색 맛과 색이 주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나의 원칙은 '쉽고 단순하게 하자'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재료로 단순한 색 조합을 이룬 그런 '잡다하지 않은 채'를 만들었어. 새로 장을 보지 않았고 냉장고 속 재료만으로. 이것은 내 습관에서 나온 건데 요리를 하다가 의도적으로 재료를 조금씩 저축해. 새우로 파스타를 했다면 새우를 4-5개 남겨서 다음날 샌드위치에 넣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저축을 해. 그래서 어쩌면 잡채는 내가 가장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기도 해.


그리고 적은 양의 설거지는 단순한 요리의 또 다른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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