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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달 Sep 28. 2024

병원 | 죽고 싶어서 혹은 살고 싶어서

죽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 그 어딘가에서

살기 싫어요, 선생님.
ㅇㅇ씨는 지금도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드시나요?
저는 제가 언젠가 죽는다면 자살해서 죽을 거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병원에서 정신과 의사와 나눈 대화이다.


업무 스트레스와 회사 대인관계 스트레스로 인해, 그리고 한창 의욕 넘치던 시기에 벌여 놓은 일들을 감당하지 못함으로써 생긴 스트레스를 관리하지 못함으로 인해 나는 매일마다 자살 충동을 느끼고 수 차례의 자해를 시도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 주변 상황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회사를 가면서 차 사고가 나서 죽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되고, 손목이 끊어져 회사를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싶어졌다.


나는 곧장 초진이 가능한 병원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길면 수개월을 기다려야만 하는 초진 예약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정신과 병원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불가능이 가능한 병원은 단 한 곳.


벌써 정신과 진료를 세네 번 정도 시도하다가 포기한 전력이 있던 나는, 다시 그렇게 다섯 번째 정신과를 찾아 치료를 재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저 어제까지는 손목 힘줄을 끊으면 타이핑을 안 해도 되니까, 회사를 안 와도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왔어요.
정말 그래 버릴까 봐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제가 왜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굳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살고 싶지 않아요.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좋겠어요.
그냥… 그냥… 죽고 싶은 것 같아요.



참 아이러니하다. 죽고 싶은 마음으로, 살려달라고 병원을 찾는다는 것이.

나는 그 무렵, 죽고 싶었던 걸까 혹은 살고 싶었던 걸까?

죽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 그 중간 지점의 어딘가에서 내 마음은 한동안 줄다리기를 하며, 때로는 격렬하게 잠겼고 때로는 고요하게 휘몰아쳤다.


불행히도 그때도 지금도 나는 여전히 죽고 싶다. 그러나 또 살고 싶다.


나는 또 내가 죽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최근의 어떤 자살 시도를 통해 나는 내가 죽고 나서 우리 가족이 어떻게 파괴되고 어떤 식으로 무너질지 조금이나마 짐작했기 때문이다. ‘가족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뻔한 소리들에 코웃음을 쳐 왔고, 지금도 그 말에 때때로 뭐라 반항(?) 아닌 반항을 하고 싶지만, 피부로 직접 와닿는 것은 달랐다.

가족이 있는 한, 나는 아마 마음대로 죽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음대로 죽을 수 없다면 적어도 내게 주어진 시간만큼 살아내야 했다. 다만 나는 그냥 고통스럽게 ‘살아내는 것’은 괴로워서 자신이 없다.


결국 나는 죽고 싶어서 잘살고 싶다.




나는 여전히 병원에 다닌다.

죽고 싶어서 혹은 살고 싶어서.


나는 지금도 약을 먹는다.

그래봤자, 라는 마음으로 혹은 어쩌면, 이라는 마음으로.


나는 여전히 갈등 중이다.

죽음과 삶의 어느 경계에서.


나는 언제나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늘 삶을 고민한다.


죽고 싶어서, 잘살고 싶다.

그리고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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