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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난언니 Nov 02. 2019

하마터면 나답지 않게 살 뻔했어

이혼이 나에게 준 선물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선택의 가능성들’이란 시를 읽다가 따라 해 봤다. 금방 끝날 것 같은 낙서는 네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내느라 한참 걸리고, 새삼스레 생각나는 것들은 놀라며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지 역 추적하느라 또 한참 걸렸다.   


   


나는 원래 이런 애였다.    

  

코믹 드라마를 좋아한다.

바다놀이보다 강에서 노는 것을 좋아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가만히 들어주고 살며시 웃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일찍 일어나 조용한 새벽 걷기를 좋아한다.

화려한 컬러의 꽃보다 싱그러운 초록의 잎을 더 좋아한다.

말보다 글이 더 예쁘다.

정적인 운동보다 격하게 동적인 운동을 좋아한다.

여름의 해질 무렵 잔디에 앉아 풀냄새 맡는 것을 좋아한다.

형식적으로 챙기는 기념일보다 소소하게 일상을 기념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계획된 일상보다 흐트러진 삶에서 체계를 잡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가식적이지 않은 것을 좋아한다.

말보다 행동하기를 더 좋아한다.

뜬금없는 일정을 좋아한다.

외향적인 줄 알았는데 난 철저히 내향형이었다.

짧은 머리가 어울려 늘 쇼트커트만 고집했는데 단발이 더 잘 어울린다.

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좋아한다.

대놓고 집순이이다.  

완전 진보인 줄 알았는데 진보와 보수의 양면을 다 가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주는 것이 좋다.

댄스보다 발라드가 좋고 잔잔한 여자 목소리가 좋다.

가을바람맞으며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한다.

따뜻한 봄 보다 시원한 가을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여기에 적은 것보다 적지 않은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이 좋다     


들여다보니 예쁘고 오래 보니 이렇게도 사랑스러울 수가 없는 요즘의 나이다. 요즘 누군가를 만나면 당차게도 내가 항상 이야기를 주도하고 앉았다. 한 다리는 꼬고 한쪽 팔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삐딱하게 앉는 버릇 때문에 종종 지적을 받기도 한다. 딱 십오 년 전 내가 그랬었다. 그땐 버젓한 직업이라도 있어 콧대가 하늘을 찌를 만도 했다지만, 지금은 변변찮은 직업도 없으면서 자신감 넘치고 기세 등등한 유쾌한 나로 돌아가고 있다.


       



“이런 말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는데 이제야 진짜 너를 보는 것 같아.”

얼마 전 초등학교 때부터 붙어 다니던 친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IMF로 어려웠던 대학 시절은 서로 휴학하고 거의 매일을 붙어 다녀서 누구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친구 제선이다.

“그래? 예전엔 어땠는데?”

“넌 정말 당찬 차도녀였지. 결혼하고 부드럽고 소극적인 모습이어서 변했나 보다 했는데 지금 다시 돌아왔어.”     

 혼자가 되니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다.  시간이 많으면 생각도 많아진다고 처음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며 불안해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할 일이 너무 많아졌다.

몇 시간이고 앉아 책을 읽고, 두세 시간씩 걷다가 들어오는가 하면 최저임금을 받는 단순한 아르바이트도 가끔 한다. 10여 년 만에 거의 처음으로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보물찾기 하듯 하나씩 숨겨진 나에 대해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알고 보니 난 참 괜찮은 애였고 세상 누구보다 가장 귀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한 시도 쉴 틈 없이 육아에 매달리는 것이 좋은 줄 알았다.

나를 옭아매는 틀이 있어 안정적이라 생각했다.

매주 시댁 방문과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듣는 것을 도리라 여겼었다.

혼자 밥 먹지 않아 좋았다.

더 나은 사랑을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며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일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그러고 보니 과거 나는 그저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어 상황과 타인의 기준에 내 취향의 기준을 맞춰가고 있었다.


하마터면 정말 나답지 않은 삶에 익숙해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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