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세계인가, 다수의 세계인가
밤의 어스름이 깔린 도시는 차분했지만, 오늘의 논쟁이 펼쳐질 ‘사유의 문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작은 원탁에 마주 앉은 사람들은 서로의 시선을 응시하며 침묵을 깨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단 하나의 세계를 살아가는가, 아니면 다수의 세계 속에서 각자의 진리를 찾는가?”
사회자는 그렇게 운을 떼며 토론의 서막을 열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지지하는 변호사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말했다.
“세계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질서와 이성의 원칙에 따라 운영됩니다. 사물과 존재는 그 본질을 공유하며, 우리 모두는 하나의 보편적 이성을 통해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단순한 신념이나 종교적 해석이 아닌, 경험과 논리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논리와 경험을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인용하며, 인간은 공통의 이성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 존재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혼란과 다원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다수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의 세계에 속해 있으며, 그 안에서 질서를 찾아야 합니다.”
이에 맞선 토마스 아퀴나스의 지지자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 반박을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더라도 사람마다 보는 것이 다릅니다. 종교적 신념이 다르면 같은 사건도 다르게 해석됩니다. 우리는 각자의 관점과 신념에 따라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적 철학을 기반으로 한 아퀴나스의 사상을 들며, 인간의 세계는 신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일지 몰라도, 인간 개개인의 시선에서는 결코 단일한 세계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같은 꽃을 보고도 사람마다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듯이, 세계는 단 하나의 절대적 질서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신의 나라와 인간의 세계는 다르고, 한 가지 해석만을 강요하는 것은 억압일 뿐입니다.”
토론이 계속될수록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보편적 질서를 강조하는 입장과 다원적 해석을 강조하는 입장이 부딪히며 논쟁은 깊어졌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조용히 말했다.
“아마도 세계는 하나일 수도, 동시에 다수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 원탁을 둘러싼 사람들은 잠시 침묵했다. 결국, 세계는 우리 각자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사유의 문턱’에서는 또 다른 토론이 시작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