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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Jun 07. 2017

간월재:트레킹과 산책 사이.

앉아있지만 말고 좀 걷는 게 어때.

그래.

좀 걷자.


그래서 느지막한 시간에 당일치기 등산을 시작했다. 시간이 늦었기에 발걸음은 빨라만 지고, 벌써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이 더 많다. 불안하다. 시간에 쫓긴다. 내려올 때 산에 해거름이 지면 제법 겁도 난다. 그러니 더 빨리 가야 할 수밖에 없다.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숨 한번 돌리지 않고, 한 번의 다리 쉼도 없이 어떤 순간에는 뛰다시피 하며 올랐다. 사실 그렇게 오를 필요는 없는,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가파른 산도 아니다. 가다가 늦어지면 다시 되돌아와도 별 상관이 없다. 억지로 올라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올라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을 가지고, 다른 여지가 끼어들 틈 없이 땅을 디딘 발바닥에만 집중한다. 그다지 말을 하지도 않는다. 당신은 간헐적으로 내게 힘들지 않아,라고만 말을 할 뿐. 어떤 것에 몰입한다는 것, 그것도 별 다른 생각 없이 몰두한다는 것은 정신을 잃고 잠에 빠져드는 것과 같다. 그러니 산에 오른다는 것은 반드시 풍경과 바람과 맑은 공기를 목적으로 하지만은 않는다. 또한 함께 오른다고 둘의 추억을 꼭 만들어야 하는 것만도 아니다. 둘이 같이 였으나 혼자 일 수 있는 것은 감상을 나누지 않고도, 서로에게 성가신 질문을 하지 않고도 공간과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봄에 가을을 꺼내 읽는다는 것은 제법 뜬금없으나, 겨울에만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라는 법은 없으므로. 나는 이 기억을 새로운 봄 무렵에 꺼내어 게으름을 반복하다 여름의 초입에 정리해 본다.


산에서는 무조건 컵라면이지.

꼭 그래야만 돼?

응. 꼭 그래야만 돼. 난 새우탕. 자긴?

... 그럼 나도 새우탕.


해가 제법 기울었을 때에야 겨우 간월재 대피소에 도착했다. 바람이 능선을 타고 갈대를 쓸어내기를 반복, 내 머리칼도 갈대처럼 이리저리 쓸려 다니며 시야를 가렸다. 간월재 대피소 매점에는 5분 후에는 매점 문을 닫는다는 매점 주인의 안내에 쫓겨 우리는 서둘러 라면과 과자를 샀다. 제법 쌀쌀해진 기온에 사람들이 옷을 여미며 벤치에 앉아 싸 온 음식을 먹고 있었다. 우리도 뜨끈한 라면 국물을 입속에 넣었다. 비어진 속에 들어가는 라면 국물의 강렬한 조미료 풍미가 입 속에 가득해졌다. 역시 라면은 산에서 먹어야 한다라는 나의 신념(!)이 또 한 번 확인되는 순간. 우스운 생각과 쓸데없는 잡담을 서로의 얼굴을 향해 던지던 와중에 올라온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 하산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땀이 식으며 어깻죽지가 약간 떨리기도 했다. 지금 내려가도 또 2시간 가까이는 걸어야 한다.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서는 다시 걸음을 돌려 내려간다. 몇 번을 뒤돌아본다. 평원에 넘실대는 갈대는 이미 바람에 날려 푸근한 머리칼을 다 잃은 듯 보였다. 늦가을의 쓸쓸함은 이런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를 뿐인데, 그 자연스러움이 새삼 산만하게 느껴지는 것. 잃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인간일 뿐이어서 그럴까. 연유를 알 수 없는 아쉬움을 발길에 담고 한 발 한 발을 꼭꼭 깊숙이 딛는다. 산을 내려오는 일이 해를 등지고 걷는 일 같았다. 하루를 보내며 돌아서는 걸음 같았다. 등지고 걷는 걸음에 해가 지는 속도와 나의 걸음 속도가 같길 바라는 것도 인간이어서 그럴 테다. 나는 반도 못 내려왔는데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해졌다.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여 겨우 차가 있는 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산을 좋아하지만, 언젠가부터 높은 산에 가 본지가 제법 오래되었다"는 말은 산을 좋아한다는 표현이 거짓일 수 있음을 생각한다. 그렇게 산을 잊고 살다 문득 오른 간월재에는 여전히 가을이 머물고 있었다. 나는 더 머물 수 없어 가을을 버리고 내려왔다.




* 장소 : 울산 울주군 가지산 간월재
* 사진, 글 : 나빌레라(navill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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