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일들은 그리움을 변주하는 일이었다.
남들에게는 그간의 시간이 쏘아놓은 화살처럼 금방이었겠지만, 곱씹고 있는 공간에서의 삶은 당사자에게 직접적인 경험이기에 그렇게 쉬이 흐르지는 않는다. 남의 아이가 제일 빨리 크고, 남이 써놓은 글을 보면 제일 쉽게 쓰인 것 같은 느낌과 같겠지.
경험이라는 것은 생각과 달라서 모든 감정을 동원하며 육체적인 행위를 담보한다. 그리하여 경험만큼 정직한 것도 없지만, 경험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그래서 그 경험을 어떻게 잘 요리하여 집어삼키느냐는 제법 중요하다.
당신을 기다리지 않겠다 생각하면서 기다렸다.
기다리지 않겠다는 말은 이미 기다림을 소거하겠다는 표현인데, 기다림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기다린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더 당신을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기다리면서 수많은 시간을 소비하였고, 수많은 나를 소비하였다. 건져진 것은 몇 줄 글과 그리움과 딱딱해져 간 생활이었을까.
당신을 기다리면서 일어난 일들을 당신에게 모두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다만 그것은 생활일 것이므로. 생활을 당신에게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관계가 생활에만 머무를 것 같았기 때문에. 그리하여 나는 당신에게 "보고 싶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자동차 엔진오일과 브레이크 오일을 갈고 엔진 소음 문제 때문에 엔진 ECU를 초기화하고 부품을 갈아 끼운 이야기며, 우유를 집 앞 마트에서 얼마에 산 이야기, 혼자 있으니 보리차를 많이 끓일 수 없다는 이야기, 밥에 콩을 넣어 지은 이야기, 운전 중 과속으로 딱지를 한번 맞은 이야기, 텔레비전을 보며 새벽 2시까지 잠을 안 잔 적도 있었다는 이야기, 빨랫감을 한꺼번에 몰기 어려워 일주일에 한 번씩 빨래를 한 이야기, 샴푸가 다 떨어졌는데 처음으로 유기농 샴푸로 바꾼 이야기, 아파트 관리실에서 전기세가 너무 적게 나와 계량기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연락 온 이야기, 추석 무렵 위층에서 아이가 시끄럽게 뛰어 미안하다며 과자세트를 보내온 이야기, 어느 날 아침 파운데이션이 떨어져 화장을 제대로 못하고 출근한 이야기, 당신이 추천하고 챙겨준 음악회에 예매하여 다녀온 이야기,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제때제때 말하기란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인가 생각했다. 물론 시차를 두고, 조금씩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사실 이 외에도 말하지 못한 일상은 차고도 넘친다. 집안 대소사에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을 알려야 하는 일만으로도 나는 이미 생활에 매몰될 뻔했기에.
각종 집안 행사와 출근 등으로 주말이 편할 날 없이 빽빽하던 시월이었다. 그리고 이번 주는 다행히도 별 일이 없다. 집안 청소를 하며 또 당신을 기다렸다. 김사인의 시집과 이성복의 산문집을 샀다. 김사인의 시 한 편을 읽다가, 지난주 돌아가신 당신의 외할아버님이 생각나서 또 한편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 나는 이렇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시를 읽는 것도 당신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당신이 없는 동안 우리 집 고무나무는 가지치기를 하여 물꽂이를 해두었던 가지들에게도 뿌리가 나와 따로 심었는데, 무려 그 녀석들이 새싹을 틔우기까지 시간의 길을 건너왔다. 고무나무도 당신을 기다린다. 나뭇가지 하나가 뿌리를 따로 내려 새싹을 틔울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 나의 물리적 시간은 이렇게도 빽빽하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서 아직도 나는 잘 알 수가 없다. 혹자는 "연애는 '연애 생활'이라 하지 않지만, 결혼은 '결혼생활'이라고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러므로 결혼은 온당치 않다고 했다지. 그도 그럴 것이, 연애는 사랑하는 '행위'이고, 결혼은 '생활방식'의 형태일 뿐이므로. 당신이 없는 동안 나는 그러므로 결혼과 연애는 양립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내었다. 범주가 다른 일은 병행이 가능하다는 뜻 아닌가 말이다. 같은 범주 내에서 고르는 일이 아니라는 뜻은 제법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연애의 대상과 결혼의 대상이 같다면 더 다행스러운 일이겠다. 결혼하여 '생활'만을 돌보면, 연애는 숨 쉴 수 없을 것이다. 연애는 언제나 상대를 돌보는 일을 중심에 두었으므로. 그러니 두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결혼하여서도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다만 '떠나 있기' 때문일까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당신은 언제나 내게 '감정'을 묻곤 했다. 그건 결혼 전이나 후나 같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랬다. "기분은 괜찮아?"라는 말을 우리는 제법 자주 하고 있다. 생활을 돌보는 일(빨래, 청소, 각종 집안일과 생존과 관계된 일)을 제외하고도 당신은 언제나 나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내게도 중요한 것은 결혼생활이 아니라 당신의 몸과 마음이었다. 빨래는 미루어도 되지만, 당신 마음은 상쾌해야 하므로.
나는 당신을 기다린다. 결혼을 하고도, 나는 당신을 기다린다. 결단코 당신을 기다리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기다린다. 시간 낭비하지 않고, 나의 자리에서 누구보다 잘 해내며 나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겉으로는 제법 그렇게 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이 돌아오기 2주 전의 지금에야 알겠다, 나의 삶이 당신의 삶과 분리되지 않았었음을. 혼자서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던 크고 작은 행사들에게도, 딱딱하고 재미없는 집안 일도, 차를 수리하는 일에도 오히려 더 진하게 당신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내가 어떤 삶을 살았건, 내가 어떤 일상을 보내었건, 그건 모두 기다리는 일이었다. 나는 아마도 내가 돌보아야 할, 돌보고 있는, 당신을 평생 기다리는 일을 습관으로 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