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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May 10. 2024

자유

보스턴백에 옷과 양말, 화장품 파우치를 넣고 소설과 시집도 한 권씩 챙긴다. 그간 모아 두었던 CD에서 몇 장을 고른다. 생수 한 병과 선글라스를 챙기고, 동네 김밥 집에서 김밥도 한 줄 사야지 생각한다. 차에 시동을 걸고 서서히 악셀을 밟는다. 건조한 봄에 어울리는 음악은 쇼팽의 발라드 1번이라 생각한다. 포장된 김밥의 은박을 뜯어 신호 대기에서 빠르게 김밥을 입에 넣는다.


목적지는 7번 국도. 부산에서 출발하는 7번 국도를 따라 강원도 고성의 화진포 해변까지, 목적지는 480킬로미터가 넘는 그 길 자체이다.


내게 7번 국도는 덜컹이는 승객이 거의 없는 시외버스에 앉아 ‘평해’까지 갔던 도로. 내가 혼자 처음으로 연고 없는 곳으로 떠나 본 곳. 당장의 밥벌이를 위해 짧았던 92일의 삶을 낯선 곳에서 살면서 알게 된 것은 돈이 아니라 도피였다. 그 무렵 나는 성취와 실패 사이에서 위태로웠다. 용기 있게 뛰어들지도 간단히 물러서지도 못하고 저울질만 했다. 나의 도피 행각은 과감해졌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물려주신 돈 오백만 원과 그리고 죄 긁어모은 몇 푼으로 아반떼를 사 잔고를 비워버렸다. 잔고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불안할 때마다, 다른 문이 열린다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지 아닌지는 붙잡고 있는 것을 놓아봐야 알 수 있다고. 사이비 교주의 연설 같은 철학 실용서들에 의지해 나는 몸을 던졌다, 아반떼로 7번 국도를 달렸다. 7번 국도의 오른쪽은 또렷한 수평선으로 채워진다. 도피는 더 또렷하게 달콤하다. 온 몸의 감각이 새롭게 살아나는 이 도피에 나는 조금씩 취한다. 평해읍을 지나다 소주를 마셨던 바닷가에 차를 댄다. 소주보다 달다. 망상 해변을 지나, 하조대 정도 오니 달콤한 취기에 운전할 수가 없다. 윤슬이 지겨워질 무렵에서 알았다. 누구에게도 연락 온 적이 없고, 누구도 보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잠시의 외로움에서 도피는 끝이 났다. 그리고 다소곳한 자유를 눈치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처럼 나에게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었다. 자유는 필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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