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해가 넘어가고 어둑해지는 오후 4시 반이 넘어간다. 자전거가 지나가기도 하고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골목길에 가로등이 껌뻑 눈을 뜬다. 눈뜬 가로등 사이로 낮은 단층집들이 옹기종기 창에 다투어 불을 밝힌다. 부엌 봉창문이 열렸다가 닫힌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와 어른들 꾸짖은 소리, 그리고 압력밥솥의 추 흔들리는 소리. 밥 짓는 냄새가 골목 한가득 메운다. 어느 집에서는 고등어를 굽는지, 어느 집에서는 삼겹살을 굽는지, 또 어느 집에서는 청국장을 끓이는지,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 골목을 걷다 보면 내가 이런 집을 원했나 보다 생각한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 단추와 숫자 버튼을 눌러 몇 걸음 걷지 않으면 도착하는 현관문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그런 집 말고. 골목에 다닥 붙어 있는 작은 집들을 볼 때면 집은 익숙하게 며칠째 입다 벗어놓은 잠옷 같아야 하는 걸까 고민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잠옷이어도 며칠 입으면 후줄근해지는. 후줄근해져도 버리지 않는, 그런 옷 아니 그런 집 말이다. 어떤 집이 좋은 집일까, 나에게는 내가 가장 돌아가고 싶은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 가장 좋은 집이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집은 나에게 가장 예민한 물질이다.
대체로는 집을 사지 못해 안달이고, 누군가는 더 좋은 집으로 가지 못해 안달이다. 집 자체가 삶의 목표이고 목적인 사람들이 다수인 세상이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눈 떠서 제일 먼저 벗어나는 것이 집이고, 집에서 벗어나려고 여행도 가는 게 삶인데, 왜 이렇게 집에 집착할까. 그렇지만 내 의식이 축 처져 잠에 빠진 공간, 몸은 아무 데나 가 있어도 마음은 혼자 가서도 낮잠을 청할 수 있는 곳, 돌아갈 곳이 꼭 있길 바라는 인간의 본능, 이런 공간이 집이어서 일까. 집을 생각하면 인간이 얼마나 영적인 존재인지 실감한다. 인간이 얼마나 감정적이고 감각에 의존한 존재인지 실감한다. 그 감각과 감정을 위해 인간은 전 재산을 내고 사겠다고 한다. 이는 막을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사랑스러운 본능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