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인 May 18. 2018

그렇게 가해자가 된다: 남성들의 성정치

넷플릭스 <루머의 루머의 루머> 페미니즘 리뷰 두번째

  <루머의 루머의 루머> 페미니즘 리뷰 첫번째를 통해서 제시카와 해나가 어떤 젠더폭력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 젠더폭력을 묵인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들에 대해 얘기해봤다. 그렇다면, 제시카와 해나에게 성적으로 폭력적인 상황은 어떻게 재생산되는 걸까? 이 글에서 필자는 '남성들의 놀이 문화'를 지목해보겠다.


따먹고 따먹히는 기울어진 운동장: 남녀의 섹슈얼리티

  해나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13명의 사람들에게 테이프를 남기며 그들의 잘못을 일러준다. 해나가 첫번째로 지목한 사람은 바로 저스틴이다. 저스틴은 해나와 놀이터에서 성관계를 했다는 루머를 퍼뜨리고 몰래 해나의 사진을 찍는다. 또한 남자아이들에게 그 사진을 자랑하고 브라이스는 이 사진을 전교생에게 전송해버린다. 이로인해 해나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소문이 퍼지고 가뜩이나 학교에 전학온지 얼마되지 않아 친구가 없던 해나는 이 사건의 여파로 외톨이 생활을 시작한다. 해나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낙인을 찍혀가며 학교에서 고립되는 반면, 저스틴은 자신의 남성성을 공고하게 구축해 간다. 따먹고 따먹히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낙인이지만,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곧 남성성의 강화이기 때문이다.

저스틴은 '자신의 전리품'을 자랑한다.



찌질한 남자가 잘나가는 무리에 들어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

해나의 친한 친구였던 알렉스는 잘나가는 남자아이들의 무리에 편입되기 위해, 섹시한 엉덩이(hot ass) 1위로 해나를 지목한다. 해나는 성적 대상으로 지목되어 성희롱의 대상이 되고, 알렉스는 그 과정을 통해 성공적으로 잘나가는 남자아이들의 무리에 편입된다. 남성적이지 못한 남성이, 남성 위계의 하층에 위치한 남성이 여성을 성적으로 조롱하고 비하하는 '놀이'를 공유하는 것을 통해 남성사회에 진입하는 과정이 잘 드러났다.

남성연대는 여성을 평가하고 성적으로 대상화하면서 형성되고 공고화 과정을 거친다.

  필자도 이런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의 경험이 있다.  오랜 시간 잊고 살았었지만, 페미니즘이라는 언어를 갖게 되면서 떠올리게 된 기억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남자아이가 "김00 젖탱이 어쩌구저쩌구"를 써서 돌렸고 그걸 보고 남자아이들이 낄낄 거리고 있었다. 너무나 수치스러웠던 14살의 필자는 교실에 들어가지 못했고 선생님께 알렸다. 당시 24살의 여성 선생님은 자뭇 엄하게 말씀하셨다.

이 일을 담임 선생님께 알리지는 않겠다. 앞으론 이런 일이 없도록 해라

  사실상 처벌 없이 덮은 것이다.  당시의 나는 내가 용서하지 못한 일을 왜 선생님이 용서하는지, 나와 저 남자아이들이 앞으로 같은 교실에서 지낼텐데 왜 처벌도 없이 끝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교육을 받지 못했던 여성 교사가 교실 내 젠더폭력을 제대로 해결해나갈 자신이 없었고 방법도 몰랐다는 것이다.) 20대가 되어 받은 심리상담에서 이 얘기를 하니 돌아왔던 것은 그 당시 내가 글래머해서 그런 게 아니였냐는 반문이었다. 키 145cm에 왜소하고 작았던 나는 2차 성징도 시작하지 않았을 뿐더러 무엇보다 언어 성폭력의 원인은 내가 아니었다. '남성들간의 성정치'였다.

  그 남자아이는 소위 잘나가는 무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간당간당 발만 걸치고 있던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나라는 여자아이를 성적으로 대상화함으로써 잘나가는 남자 무리에게 웃길 거리를 제공하고, 함께 낄낄거림으로서 그 무리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아이는 남성무리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었다. 엄기호는 <젠더와 사회>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자와 남자는 여성의 성을 착취(성적인 농담과 은유, 과장)하면서 공모자가 되고 이를 통해 관계를 공고히 한다. 이들의 관계는 동성적이지만, 동성애에 대해서는 배타적이다. 이성애 남성일 때 비로소 남자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남자들의 세계는 동성사회적인 동시에 반동성애적이다.

엄기호, <젠더와 사회> "남성성의 위기와 한국의 남성문화" 중

이렇듯 남성사회는 여성의 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함으로서 공모자가 되고 관계를 구축해간다. 이런 구조에서 남성 위계사회의 하층에 위치한 남성이 여성을 성적으로 조롱하고 비하하는 '놀이'를 통해 남성사회에 진입하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고 쉬운 방법인 것이다. 이렇듯 남성연대는 여성을 평가하고 성적으로 대상화함으로서 형성되고 공고화 과정을 거친다


남성 위계의 하층에 위치한 남성은 여성을 성적으로 조롱하고 비하하는 '놀이'를 공유하는 것을 통해 성공적으로 남성사회에 진입한다. 남성연대는 이렇듯 여성을 평가하고 성적으로 대상화함으로서 형성되고 공고화 과정을 거친다



그것은 칭찬이 아니라 폭력이다.

해나가 '섹시한 엉덩이 1위(best ass)'로 지목되어 남자아이들의 성적 대상이 되자, 클레이는 칭찬이지 않냐며 해나의 아픔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해나: "너 정말 나한테 상처준다"

클레이가 살아온 세계, 그러니까 남성의 경험에서 섹슈얼리티에 관한 언급은 웬만하면 다 칭찬이다. 그러나 다리를 벌려서 앉는 것조차 부끄러운 몸으로 간주되는 여성의 경험에서 섹슈얼리티에 관한 언급은 웬만하면 욕이다. 실험을 한번 해보겠다.

남자가 다리를 벌린다
여자가 다리를 벌린다

  여성을 타자화하는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여성은 ‘여자’이지만, 남성은 ‘인간’으로 존재한다. 때문에 ‘여자가 다리를 벌린다’라는 문장을 보면 성애화된 여성의 신체가 떠오르지만, ‘남자가 다리를 벌린다’라는 문장엔 그저 한 사람의 ‘신체적 동작’이 떠오를 뿐이다. 이렇듯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대칭적이지 않다.  '따먹고 따먹히는 세계',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남성중심적 사회다.

해나가 겪은 언어 성폭력을 칭찬이지 않냐며 이해하지 못했던 클레이는 테이프를 들으며 해나가 겪은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폭력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남성성의 대안은있다

  그렇다. 그럼에도 남성성의 대안은 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친절하게도 대안적인 남성성을 제시한다. 바로 클레이다. 클레이는 해나에 대한 루머를 신경쓰지 않는다. 해나가 섹시한 엉덩이 1위로 꼽히자 해나를 성추행한 브라이스와 마커스, 몰래 해나의 사진을 찍으며 스토킹한 타일러, 그외 해나를 두고 수근거린 사람들과 다르게 클레이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해나의 진심을 바라볼 뿐이다. 또한 겉보기에 체격이 왜소하고 말수가 적은 클레이는 굳이 남자다워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알렉스처럼 해나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무리수를 굳이 사용하여 '잘나가는 남자애들' 무리에 편입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뿐이다.


또한 클레이는 해나와 키스를 하고 섹스에 돌입하게 되자, 끊임없이 동의를 구한다. 괜찮은지, 괜찮은지. 매순간 동의를 얻는 모습은, 그렇다. 섹시하다.

동의는 존나 섹시하다

앞서 첫번째 리뷰에서 성폭력의 정의는 '피해자가 얼마나 저항했는지가 아니라, 가해자가 충분히 동의를 구했는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합의된 성관계의 의미는 '충분히 동의를 구한 상호적 관계'이다. 클레이는 충분히 동의를 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의를 구하는 것에도 한계가 존재한다. '남성은 적극성/여성은 수동성'으로 정의된 성별이분법 각본 속에서, 주로 동의를 구하는 것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선의 대안으로서 한사람만 일방적으로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성평등한 파트너쉽을 권하고 싶다. 그러나 아직 친밀한 관계가 아니고 상대방의 동의 여부를 알 수 없다면, 동의를 구하는 것을 권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성이 성폭력 피해 경험을 말할 수 없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