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 터지는 밤
친구랑 동거하기로 하고 가장 기대했던 것 중 하나가 예능 프로그램 '나는 솔로(이하 나솔)를 같이 보는 것이다. 우리는 지독한 나솔 매니아들이라 나솔 본방은 물론이고, 나솔 최종선택이 끝난 뒤 유튜브 채널에서 하는 나솔 라이브 방송도 놓치지 않는다. 나솔 라이브에선 최종선택 커플의 현커(현실 커플) 여부가 공개된다.
나솔을 향한 우리의 열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수요일이 나솔데이라면 목요일은 나솔사계데이다. 나솔사계(나는 솔로, 사랑은 계속된다)는 나솔 출연진 중에 (가끔 '짝' 출연자도 나옴) 아직도 솔로인 사람들이 나와서 다시 사랑을 찾는 나솔의 A/S 버전이다. 우리는 그렇게 나솔, 나솔 유튜브 라이브, 나솔사계까지 챙겨본다. 우리는 진정한 나솔 순정파!
나솔 시작 전, 편안한 잠옷 차림으로 (약간 흥분한 얼굴) 거실에 나와서 나솔푸드(나솔 보며 먹을 간식)를 준비한다. 그리고 열 시 반이 되면 반가운 데프콘의 얼굴과 함께 나솔이 시작된다. Hump day! 직장인이 가장 피곤한 요일이 수요일이라는데, 수요일은 나솔 보는 날이라 그나마 버텼다. 어서 나를 기쁘게 해 주렴 광수야. 또 빌런짓을 부탁해.
우리의 눈은 나솔을 보고, 입으로는 무언갈 씹으며, 중간중간 감탄사도 내뱉는다. 주로 "윽. 왜 저래!!" 혹은 "미친 거 아냐???“ 미간의 주름이 깊어지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넘어 다음 주 예고와 함께 나솔이 끝난다. 막상 다 보고 나면 ”이번 편은 별 내용이 없네. 그냥 잠이나 잘걸” 그랬다며 불평하지만, 우리는 관성처럼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밤에 나솔과 나솔사계를 함께 본다.
나는 왜 이리 나솔을 좋아할까? 예능 무한도전 이후로 이렇게 꾸준히 챙겨보는 프로그램은 나솔이 유일하다. 그렇다고 연애 예능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대표 연애 프로그램인 솔로지옥, 환승연애, 하트시그널을 제대로 챙겨본 적이 없다. 간혹 유튜브 쇼츠나 짧은 클립 영상으로 본 정도다. 그런데 아마 나솔을 연애프로그램이라 생각하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솔은 인류 탐구생활의 보고! 늘 예상을 깨는 출연자들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는 게 재밌다. 예의 없이 굴거나 무례한 출연자의 행동을 보며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하고 교훈을 얻기도 한다.
주변에 흔히 있을 거 같은 사람이(실제로 지인의 친구가 나솔에 출연했다) 결혼을 목적으로 나솔에 출연하는 상황이 재밌다. (이렇게나 결혼에 진심이라고?) 5박 6일의 시간 동안 솔로나라에서 사랑에 빠지고, 상처받고, 울고, 집착하고, 싸우고 등등.. 필터 없이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보고 있으면 정말 놀랍다! 웬만한 드라마 보다 나솔이 더 드라마틱하다.
다양한 캐릭터가 두드러지는 나솔 자체도 재밌지만, 나솔을 보면서 동거인이랑 같이 이야기하는 게 더 재밌어서 이전보다 열심히 챙겨보게 된다. 우리의 대화 주제도 방송 회차마다 달라진다. '나솔사계에 출연한 역대 최악의 광수는 과연 진짜 변했을까? 왜 영숙은 마음도 없으면서 거절을 제대로 안 하는 거지?' 등 출연진들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분석을 주고받는다. 이 순간 우리는 인류 탐구 학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출연진을 보고는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많다'라는 깔끔한 결론을 내린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솔을 보면서 결혼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꼈던 적이 있다. 매번 새롭게 갱신하는 빌런 같은 남자 출연자들을 보면서 ‘PD가 복도 많지!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모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프로그램을 편하게 즐기기 어려웠다. ’저렇게나 괜찮은 사람이 없다고? 여자들이 너무 아까운 거 아냐?‘라고 생각하며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이가 들수록 좋은 남자가 없을까 봐,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빨리 괜찮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이 많아지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이러니한 건 나솔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저런 사람이랑 결혼하느니 혼자 사는 게 낫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괜찮은 사람을 만나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 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나 모순적이라니. 당시에 결혼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나의 마음이 더 불안했던 거 같다. 그래서 소개팅을 정말 많이도 했다. 다행히 지인을 거쳐하는 소개팅에서는 나솔 만큼의 빌런은 없었지만 나의 인연을 만나기도 참 어려웠다.
나솔 말고도 친구랑 동거하며 함께 즐기는 프로그램이 많아졌다. 요즘엔 흑백요리사에 빠져서 출연자들의 식당 정보를 공유하고, 먹고 싶은 요리, 응원하는 쉐프, 감동받은 포인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연말에는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쉐프의 식당에도 같이 가보기로 했다! (근데 올해 예약은 이미 다 마감이란다...) 음식도 혼자 먹는 것보다 같이 먹어야 더 맛있는 것처럼 컨텐츠도 역시 혼자 보다는 같이 보는 즐거움이 더 크다.
같은 컨텐츠를 보고 서로가 느낀 감정과 깨달음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무려 방문만 열면 바로) 나와 이야기를 나눠줄 동거인이 있다니! 피곤한 수요일이 마냥 힘들게만 느껴지지 않는 유일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