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전은 상사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연히 브런치에 있는 다른 글 (사내 정치와 인정 받기)을 보다가 최근 후배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그 후배의 동기들이 모여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선배들 중에 진작 진급했어도 될 사람인데 아직 그러지 못한 대표 인물 중에 하나가 바로 나라고 나왔단다. 듣고 보니 서글픈 얘기다. 조직 안에서 진급을 비롯한 발령, 나의 신변에 관한 것이 워낙 내 뜻대로 안되었었다는 글을 쓴 적도 있다. 어쨌든 후배들 눈에 ‘능력은 있으나 뭔가 부족한’ 선배의 케이스라니.
그러면서 그 후배의 한 마디 ‘의전을 좀 더 잘 하셨으면...'
어떻게 알았지? 내가 의전에는 잼병이라는 사실을. 한 편으로 선배든 후배든 다른 사람을 눈 여겨 보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후배가 나에게 말한 의전의 의미에 대해서 더 자세히 얘기를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물론 의전=사내 정치라고 단정하는 건 아니다. 넓은 의미로 생각해 보면 상사와 함께 하는 회식도 어쩌면 일상적인 의전의 하나다. 함께 출장을 가서 소위 ‘가방 모찌’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적합한 뉘앙스의 대체어가 없다) 하는 것은 보다 본격적인 의전이다.
나를 되돌아 보면 굳이 상사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맘에 쏙 들게 한 적도 없다.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주의라서 아무리 상사일지라도 그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두고 싶다. 아내도 항상 나에게 이 점을 주의 시켰었다. 회사에서는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이다.
지난 출장이 떠오른다.
여럿이 함께 간 출장의 마지막 회식이 좀 길어졌다. 다른 직원들과 달리 조금 멀리 숙소를 잡은 모 상무님이 나에게 당신을 데려다 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어떤 맥락에서 그런 부탁이 나왔는지 기억은 희미하다. 아마도 당신 혼자 가는 길이 심심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무님이 거나하게 취해서 누가 봐도 모셔다 드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또 달랐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범지대라서 혼자 다니기 꺼려지는 곳이었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게다. 당시 나는 정말 넘어지면 코 닿을 곳에 숙소가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정말 가야 하나? 왜 함께 가자고 하지? 나를 시험하는 건가? 같이 안 가면 이상할까? 등등.
결론적으로 나는 그 분을 모셔다 드리지 않았다. 그것이 그리도 싫었나 보다. 아마 억지스러운 모양새가 마음에 걸린 것 같다. 생각해 보니 그 때의 나도 참 재수 없었다. 함께 가면 이런 저런 얘기도 하고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기회였을텐데 말이다.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이자 직급으로는 바로 위에 속하는 상사가 있다. 그는 누가 여기(싱가포르)로 출장을 오면 후배든 선배든 정말 살갑게 챙긴다. 최근 남자 후배 둘이 출장을 와서 함께 회식을 간단히 했다. 그런데 이 동료는 굳이 그 두 사람이 묵고 있는 호텔까지 데려다 준다고 따라 나섰다. 만약 나였으면 그래, 잘 들어가라 하고 보냈을 것이라 100% 장담한다. 어쩌면 의전이라는 건 상사에게만 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다 같은 행동을 하는 것 아닐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작년 출장, 최근 이 곳에서 출장자를 대하던 동료의 행동, 그리고 후배가 내게 말한 ‘의전 좀…’ 이라는 말이 묘하게 오버랩 된다.
말이 길어졌는데 결론은 간단하다. 선배나 상사라고 더 챙겨주고 깍듯이 대하는 의전을 잘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지금 내 상사의 태도를 보면서 격하게 느꼈다.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그가 선배라면 그에 맞는 예우를 해주고, 동기나 후배라면 잘 챙겨주는 태도가 본질이다. 일을 잘 하는 능력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사람으로서의 매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