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ack' 변화와 재창조를 이끄는 힘, 서평.
slack: 느슨한, 느린
조직 안에서 중간 관리자로 일한지 약 8년 차 정도 되었다. 초반에는 상대적으로 책임 부담이 덜한 위치에 있었지만 지금은 나도 챙기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챙겨야 하는 위치다. 조직 관리는 하면 할 수록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 원래 어려운게 맞단다.
이 책의 제목, Slack은 느슨한, 느린.. 이런 뜻이다. 조직 관리와 운영 차원에서 Slack의 의미는 효율을 위해 비효율의 여유를 남겨두라는 새로운 정의를 갖는다. 조직을 덜 효율적으로 만들어야 더 생산적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주장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매트릭스 구조에 의한 자원 (사람) 관리는 실제로 덜 생산적인 환경을 만들 수 밖에 없다. 매트릭스 구조는 사람을 대체 가능하고 언제나 분할해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사람, 특히 지식근로자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초반에 읽다가 놀란 부분은 위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지금 우리 조직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 관리의 허상은 내가 궁금증을 가졌던 것을 콕 짚고 있다. MBO 상에서 20% 만큼 투여해서 일 하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Working day 5일을 기준으로 20%는 하루만큼(8시간)의 일이다. 일주일에 하루는 해당 프로젝트만을 위해 오롯이 쓰라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 업무는 그렇게 일어나고 진행되지 않는다. 어떤 날은 하루가 모자라게 해당 업무를 해야하고, 어떤 날은 전혀 하지 않는다. 평균적으로 20%.. 라는 말은 허구에 가깝다. 평균적이라는 것은 더하고 덜하는 것의 중간 값을 의미하는 것이니, 결과적으론 실제 100%가 아닌 120, 130%의 업무 참여를 독려하는 시스템이다 (반대로 평균의 의미에서 70,80%를 하는 개인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개인의 참여율을 100% 기준으로 쪼개 넣기 시작하면서 관리와 효율이라는 전제가 깔린다. 과연 관리자/평가자는 이 사람이 20% 만큼을 했는지, 18.5% 만큼을 했는지 알 수 있을까?
고백하건데 나 역시 한 때는 이러한 업무분배가 가능하고, 그만큼의 일을 하는 것이 정당하고 가치가 있으며, 조직 관리의 차원에서 적합한 방안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다. 저자는 Slack을 가져야만 100% 역량 발휘라는 허상을 버릴 수 있고, 여유를 통해 변화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두려움의 문화.
1. 어떤 특정한 내용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2. 목표가 아주 공격적으로 설정되지만 사실상 목표를 달성할 기회는 없다.
3. 권력은 상식보다 우위에 있다.
4. 살아남은 관리자들은 매우 화를 잘 내는 무리다. 모든 사람이 그들을 두려워한다.
위의 상황들이 두려움의 문화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내용들이라고 할 때, 나는 특히 1, 3번에 동감한다. 우리 조직은 어느 정도 두려움의 문화를 갖고 있다. 내가 만난 어떤 상사들도 '아무 말이나 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해도 된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음을 안다.
권력에 대한 부분도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최근의 한 회의에서 한 임원이 이 제품의 방향을 A라고 잡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그 임원보다 한 직급 낮은 임원이 그렇게 하면 안될 것 같다고 많은 사람들이 놓인 자리에서 반박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의견의 주고 받음인데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흠칫했다. 어떻게 상급자의 의견에 반박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감탄과 동시에 놀라움이 공존했던 것이다.
테일러주의. 반복되는 프로세스에서 그 일을 하는 누군가는 항상 대체 가능하다. 표준화된 프로세스를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나 지식근로자에겐 테일러주의가 맞지 않다. 지식근로자는 프로세스에 맞춰 일하기 보단 주변과의 관계와 네트워킹을 통해 일한다.
프로세스 강박증에 대한 내용은 생각해 볼 것이 좀 있다. 나는 늘 회사는 개인의 네트워크 보다는 시스템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개인별 능력에 기대는 것은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나 있음 직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조직은 그런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지식근로자의 일하는 방식은 소위 스타직원의 네트워킹으로 좀 더 좌지우지 된다고 한다. 내가 일했던 방식을 돌이켜 보아도, 머릿 속으로는 시스템적인 일처리를 이상향으로 해 왔지만 실제 업무는 다분히 개인 능력과 인맥에 의존했던 것 같다. 주변의 '일 잘 한다'는 사람들을 봐도.. 이것이 단지 지식근로자이기 때문에 필수 불가결한 현상인지, 아니면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거대 조직' 이전 단계이기 때문인지 아직은 판단할 길이 없다.
MBO(Management by Objectives). 목표를 달성하거나 초과하면 그 사람은 완전히 성공한 것으로 인정된다. .. MBO는 지금까지 하던 일을 더 잘하면 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작년에 한 것을 똑같이 하되, 올해는 X를 더 하라. X의 증가를 목표로 삼는 것은 경영진이 X의 증가가 그들을 성공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결정했다는 걸 뜻한다. .. MBO의 목표는 항상 단순한 추정치이다. 어떻게든 단순한 숫자로 표현하라고 말한다. .. 할당량 만큼 팔아야 한다는 비본질적인 동기요인 때문에 고객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본질적인 동기를 잊어버릴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단 한번도 스스로 문제제기 해보지 않았던 MBO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분명히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연구직(지식 근로자)은 MBO의 정량적/정성적 목표를 잡는 것이 단순히 작년 대비 숫자의 증가로 설명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전년대비 목표 증가는 매출이나 수익 등의 재무지표가 더 적합하다). 되도록 정량적 목표를 잡으라고 하는 것 또한 관리 차원의 편의성 때문이다.
한 때 부서에서 6시그마 운동을 열심히 전개한 적이 있다. 6시그마에서 항상 강조하는 것이 있다. '측정되지 않으면 개선할 수 없다'. 6시그마는 품질을 높이는데 부적절한 오류를 잡는 성격이 강하다. 6시그마는 전통적인 MBO 개념의 목표와, 이를 달성하는 방법론으로서 잘 매칭되는 것처럼 보인다. 몇 년 간의 6시그마 활동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새로운 것을 연구개발 하는 방법론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존의 것에서 품질 개선하는 방법으로는 적합한 것 같다).
사실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말은 비본질적 목표로 인해 핵심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MBO 달성만을 강조할 경우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WHY 보다, 목표(WHAT)가 더 중요하게 보여진다는 점이다. 또 하나, 일 하는 이유 WHY를 강조하면서 정작 개인/조직에 대한 평가지표는 MBO 상에 드러나는 수치적 목표를 가져감으로써 엇박자가 난다. 연초에는 열심히 이 일의 당위성, 고객에 대한 본질품질을 고민하다가도 결국 연말 몇 개를 얼마 팔았나로 귀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연말 MBO 평가가 공정하지 않아 보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다만 저자가 MBO를 낡은 유물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나 역시 책을 보다가 궁금해서 MBO의 대안이 될 수 있는 평가방법을 검색해 봤지만 딱히 찾을 수 없었다.
우리의 삶에 여유가 필요하듯, 직장에서 일할 때도 여유가 필요하다. 아주 단순한 논리지만 현실적으로 잘 안되는 부분일 수도 있다. 특히나 관리자는 의지적으로 여유를 두어야 한다. 그래야 급한 일도 처리할 수 있고, 더 생산적인 업무가 가능하다. 중간 관리자들이 변화의 가장 핵심층이며, 서로 만나 관리에 대한 학습과 성장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격하게 공감한다. 읽는 동안 저자의 문제 제기에 대안이 뚜렷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 아쉬웠지만, 한 편으론 내가 여러가지 생각을 해볼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한 1-2년 뒤 다시 읽어봄직 하다.
이 책의 아쉬운 점을 말하고 싶다. 수십년 간 여러 회사와 조직의 컨설팅을 하면서 저자가 찾은 인사이트로 부터 문제 제기는 잘 되었으나 이를 설명하는 근거가 부족하다.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라 해도 주장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압박감의 비용이라는 내용에서 압박이 업무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의 그래프를 그렸는데 그래프의 모양에 대한 어떠한 논리도 없다. 저자가 보기에 그럴 것이다.. 라는 말이 근거의 전부다. 다른 예도 마찬가지다. 초과근무가 지식근로자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주장은 있지만 이를 뒷받침 하는 fact 또는 연구사례가 없다. 그러다보니 책을 읽으면서 음.. 그렇군, 왜? 라는 질문이 떠오를 때쯤 다음 섹션/내용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런 점에서 다분히 직관적으로 쓰여졌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