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같은 파트의 동료가 논문을 썼다. 파트 리더를 맡고 있는 내게 검토(논문 리뷰)를 요청해 왔다. 내가 리더를 하기 전부터 설계되어 진행된 일이거니와 별 다른 코멘트가 필요 없는 깔끔한 내용이었다. 그래도 의견을 묻는 요청이니 읽어보고 고민을 했다. 역시 특별히 해 줄 조언을 찾기 힘들었다. 잘 쓰셨네요,라고 솔직하게 답을 해줘도 조금 미안한 맘이 든다. 괜히 성의 없이 리뷰한 것 같기 때문이다.
논문은 보통 영어로 작성하기 때문에 외부 전문가를 통해 교정 단계를 거친다. 논문 교정을 위한 비용품의 결재를 보니 논문의 저자에 내 이름이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아마 파트 리더이고, 한 번 검토를 요청했으니 논문 저자로 넣어준 것이란 합리적 추론이 가능했다.
막상 아무것도 한 것 없는 내 이름이, 저자들 중에 하나로 올라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지난 몇 년, 리서치를 거의 하지 않고 주재원으로 지내면서 논문 발표가 뚝 끊긴 지 오래다. 논문은 회사의 연구자이면서 '업으로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자존감을 지켜내는 하나의 수단이다. 논문의 가치나 저널의 수준과 무관하게, 논문에 참여한다는 건 내게 그런 의미였다. 그런 의미를 갖는 논문을 한동안 쓰지 못하고 이력서에 추가할 내용이 없었는데, 이렇게 이름을 넣어주니 모른 척 넘어갈까 하는 마음이 든 건 사실이다. 적어도 무임승차까지는 아니잖아? 어떤 내용인지도 모른 채 이름이 올라갔다면 모를까, 나는 그래도 투고 전에 읽어는 봤으니까 말이다. 과거의 다른 선배들 같은 ‘그런 정도’는 아니니까. 막상 저자로 넣어주지 않았으면 섭섭한 생각이 들었을 거야. 이런 이율배반적 사고도 했다. 나쁜 유혹의 생각이 잠시라도 들었던 것을 고백한다.
결론적으로 이름을 넣어 준 그 동료분에게 고맙지만 이름은 빼 주십사 사양을 했다. 논문을 리뷰해 준 것에 대해 인정해 주고 싶다면 논문 말미에 acknowledgement라는 섹션에 한 줄 언급해 달라 부탁했다. 마음속에 늘 담고 있던 생각이 있었다. 기여한 것이 없는 사람이 관습과 관행의 미명 하에 논문 저자가 된다는 것은 안될 일이다. 우리가 관행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용인하면 건강한 연구문화, 바람직한 회사 연구는 다시 회귀한다. 후배 시절에 겪은 것을 이런 식으로 보상(?) 받으려 해서는 곤란하다.
예전부터 논문 저자의 공정성에 대한 규칙의 필요성을 생각해 왔다. 오래전 브런치에도 생각을 밝힌 적이 있다. 주니어 때부터 목격해 온 연구 논문과 관련된 아름답지 않은 사례들. 예를 들면 상사라는 이유로 저자에 넣어주기 같은 것 말이다. 연구 윤리나 회사 연구 문화의 성숙도가 낮았던 시절이었다. 나 또한 이해하기 어렵던 일의 당사자이기도 했었기에(여기에 구체적으로 쓸 수는 없다) 적어도 후배들에게는 이런 고민 없기를 바랐었다. 다행히 시대가 달라지고 구성원의 생각이 더 성숙해져서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다. 지금은 훨씬 더 공정한 잣대와 기준으로 논문의 저자를 선정한다고 알고 있다.
링크드인에서 구글 수석 디자이너 김은주님의 글을 보았다. 회사에서 나다움, 나답게 하는 행동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유혹의 마수가 나쁜 생각으로 꼬실 때 결과적으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나만의 규칙 때문이었다. 일을 하다 보면 업무 내적 외적으로 여러 가지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에 노출된다. 그럴 때 자칫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면 김은주님의 글처럼 나는 누구인지 스스로 정의해 둘 필요가 있다. 난 어떤 사람인지, 어떤 동료가 되길 원하는지, 그게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다운 모습인지 말이다. 그것을 남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행동과 판단의 규칙으로 만들고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덧. 스스로 세운 규칙을 지키며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자신이 괜히 멋있어 보인 것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