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지심, 오히려 좋아!

by nay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나는 다른 박사들에 비해 아는 것이 없다던가, 경험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른바 자격지심이 있는 사람이다. 근원적으로 올라가 박사 졸업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해결하지 못했다는 이력에 있을지 모른다. 그것 말고도 (자격이 부족한 박사라는) 정황적 증거들은 수없이 많다. 입사 초기에 단백질 샘플을 준비하다가 준비 중인 시료를 얼려서 몽땅 날려버린 사건이 있다. 그때 나를 어이없게 또는 한심하게 쳐다보았던 선배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샘플을 다루는 기초조차 모르는 인간이 박사라고? 이런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자격지심에서 시작한 피해의식 일지 모르겠다. 남들은 척척 아는 학문적 내용에 대해서도 기억을 잘하지 못하는 편이다. 학부 때 열심히 외우고 다니던 생화학 기초를 잊은 지 오래다. 분자량과 농도 계산, 화학반응 등에 대해 분명히 잘 배웠고, 배워서 써먹기도 했는데 누가 물어보면 쉽게 답을 내지 못한다. 우물우물, 답을 구하는 척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오죽하면 어제는 회의를 하다가 후배가 무언가 묻길래, 나도 모르죠 했더니 ‘다 아시는 줄 알았는데… ‘ 이런다. 나름 박사에 오래 일해 온 사람이니 그런 편견이 자리 잡을 수 있다. 잘 아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쌓이면 그런 이미지와 편견을 등에 입고 대충 떠들어도 되겠군 하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아 역시 나는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같이 얘기하다 보면 똑똑한 사람들이 주변에 참 많다. 아는 것 많고 실험을 해도 실패 없이 끝내는 동료들을 보면 경외심이 느껴진다. 그들이 똑똑함과 노련함을 다른 누군가에게 열심히 드러낼 때, 와 저걸 어떻게 기억하지 하면서도 가끔씩 - 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 말하는 사람의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그럴 때는 확신에 차 열변을 토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기도 하지만, 잘 모르는 것을 잘도 떠들어 대는구나 싶어 아쉽다. 완벽주의자 성향 때문인지 난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절반 정도만 아는 것에 대해서는 딱 거기까지만 자신 있게 말한다. 부풀리거나 단편적 경험을 진실, 사실, 진짜라고 힘주어 주장하는 편이 되지 못한다.


자격지심은 대부분 부정적 요인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요즘은 부족한 나라는 인식을 스스로 고마워하고 있다. 어딘가 한구석이 비어있다고 자평하는 박사로서(또는 작은 조직의 리더로서) 자격 부족은 오히려 겸손한 나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겸손하면 지능이 낮아도 꽤 괜찮은 성과를 내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다(박진우의 브런치). 스스로 성과를 냈다고 자랑하기에 쑥스럽지만 그동안 인정받은 것으로 볼 때, 성과를 낼 줄 아는 리더십은 있지 싶다.


‘곤경에 빠지는 것은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마크 트웨인).


잘 모른다는 생각은 겸손함 뿐 아니라 의사결정에도 도움을 준다. 잘 알고 있다는 편견이 없다는 것은, 열린 가능성을 전제하여 현상을 관찰하고 결과를 분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편견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자신 없음'으로 인해 더 숙고하고 합리적 판단의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아는 것이 없는 관계로 덜 편향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판단의 근거를 객관화할 수 있다는 건 스스로 생각해 봐도 꽤 괜찮다.


어떤 후배가 어떤 실험을 두고 A, B 두 가지 종류의 세포를 고민하고 있는데 연차 높은 선배가 와서 A로 해, 이렇게 말을 했단다. 그 선배의 판단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실무 관점에서 A세포는 단점이 있었다. 선배는 그걸 제대로 몰랐고, ‘잘하면 된다’는 원론적인 피드백만 주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 A세포로 했던 실험은 현재 사용이 불가능하다. 자신 있게 답을 준 선배의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실제 실험을 하지 않는 위치에 있었던 그의 말을 굳이 다 따라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보여준 ‘확실히 안다는 착각’ 덕분에 후배는 시간이 지나 괜한 곤경에 빠진 것이다.


부족하다는 자격지심이나 자신 없음을 한탄만 할 이유는 없다. 박사가 그것도 모르냐고 어떤 자리에서 핀잔을 듣거나 의심에 찬 눈초리를 잠시 받을지는 몰라도, 잘 모르면서 아는 척 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그 후의 위기는 오히려 줄어든다. 모르면 모르는 것이지, 굳이 자존심 때문에 엉뚱한 일을 만들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 얻어진 겸손함으로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높일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좋다. 요샛말로, 오히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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