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의 함정 - 당신의 일은 충분히 가치 있다.

by nay

회사에서는 늘 혁신을 부르짖고 미래 지향적 과제를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현행을 유지 또는 보수하는 일들이 훨씬 더 많다. 책 <룬샷>(사피 바칼)에서 말하는 룬샷 과제, 즉 혁신 기술과 제품은 도전적인 만큼 성공 가능성이 낮다. 이런 도전을 든든히 뒷받침하려면 상대적으로 캐시카우를 벌어들일 수 있는 기존의 제품들과 기술(책에서는 프랜차이즈라고 표현)이 필요하다. 내가 속한 부서의 일은 룬샷 보다는 프랜차이즈 업무를 서포트하는 것이다. 혁신적이고 공격적인 업무 스타일이 아니라 효율적, 안정적으로 실험을 수행하고 지속적인 데이터를 제공해 줘야 한다.


대부분의 일이 그러하듯 업무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이른바 루틴이 된다. 반복적이고 예측 가능하며 어지간한 결과물이 아니면 별다른 티가 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 계속 새로운 시도가 있다. 전에는 없던 새로운 기술들을 도입하거나 기존의 것을 개선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급진적 개선과 변화보다는 안정적인 운영을 바탕으로 다양한 부서에서 요청하는 일을 처리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현재 부서의 미션이기도 하고.


처음 이 부서의 리더를 맡았을 때 멤버들과 얘기를 나눠보니 상대적 박탈감이나 자기 효능감, 만족도가 낮은 것을 알았다. 업무를 해보니 과연 이해가 되었다. 타 부서의 요청 사항을 가급적 가능한 방향으로 해결해 주는 - 일종의 홍반장 느낌 - 상황이 펼쳐지면서 내 목소리와 의견보다는 남의 말을 따르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연구자로서 좀 자존심 상하는 것이긴 한데 회사 일이라는 대명제를 거스르긴 어려웠다.


하루는 가만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하는 만큼 인정받기는 어렵다고 해도 정말 가치 없는 일을 하는 것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부서에게 끌려 다니는 느낌과 함께 내부적으로는 '내가 하는 일이 사실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해 버리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객관적으로 정말 부서/담당 연구원의 경쟁력을 다시 따져보기로 했다. 그러니 오히려 다른 답이 나왔다. 회사에서 우리 부서의 역할이 무척 중요할 뿐 아니라 상당히 독보적인 능력이 있어서 대체 불가능한 업무임을 다시 깨달았다. 충분히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업무와 위치인데, 그동안 왜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난 그 답을 '전문성의 딜레마'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처음엔 어렵던 일을 하나씩 배워갈 땐 배움의 기쁨이 있다. 다른 부서의 관점이나 입장보다 자신의 즐거움이 더 큰 때다. 그렇게 어렵던 일이 익숙해지면 전문성을 가진 사람의 눈에서는 업무의 난이도가 낮아진다(자기 역량이 높아진 걸 못 보는 것). 또한 지난 5-6년 동안 업무의 수준과 프로세스도 상당히 향상되었는데 내부에 있는 당사자는 잘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평균적인 눈높이가 올라가니 늘 하던 업무 수준은 '당연하고 일상적인' 것처럼 이해되는 것이다. 역량 향상과 발전의 즐거움을 망각한다. 게다가 안정적, 효율적 운영을 원하다 보니 루틴한 업무화 되어 버렸다. 가끔은 이 정도의 지식과 연구 배경을 가진 사람이면 나 아니어도 누구나 할 것 같다는 생각, 대체 가능한 사람이 아닐까 두려움도 생긴다. 회사를 떠난 사람의 말처럼, 이렇게 전문성 있게 효과적으로 요청을 처리하는 것은 대단한 능력임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너무 익숙해지니 업무의 가치를 스스로 낮추는 모양새가 되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호구가 된다고 한다. 남이 호구라고 바라보지 않아도 전문가 스스로 익숙함과 반복으로 인해, 프랜차이즈 업무/일상적인 지원 업무의 가치를 낮게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1 on 1 미팅을 하면서 모두에게 우리는 충분히 높은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며, 당신의 일은 아주 가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하는 일이 쉽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님을 자각시키려고 노력했다. 글쎄, 내 뜻이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다. 한 번으로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독자분들 중에 전문적인 역량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만족스럽지 않은가? 어쩌면 자신이 현재 너무 완성도 있게 높은 수준에 있어서 딜레마에 빠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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