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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김에 산다, 다만

by nay

긴 옷을 찾아 입을 계절이다. 에어컨 없이는 살지 못할 정도로 무덥던 여름이 있었지만 시간과 함께 어김없이 지나간다. 지구는 멈춤 없이 돌고 늘 그랬던 것처럼 계절은 바뀐다. 올해도 세계 이상 기후로 인한 피해 보도가 연일이었다. 예전에 없던 폭염, 큰 산불과 폭우, 지진 등으로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프다.


앞으로 20년 뒤, 2040년이 되면 지구는 지금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은 데이터로도 증명이 된다. 유엔 ‘2000~2019 세계 재해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년 간 앞선 20년 보다 2배 가깝게 재해 건수가 늘었다. 이상 기후, 점점 올라가는 지구의 온도, 그리고 앞으로 남은 지구의 수명은 무한하지 않다. 지구의 수명을 앞당기도록 만든 것은 외계인도 아니요, 갑작스레 자전과 공전 주기가 바뀐 때문도 아니다. 모두 인간이 자초한 결과다. 산업화의 기치 아래 열심히, 그러나 무자비하게 곳곳을 개발한 결과가 그렇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 호수에서 2년 넘게 자급자족하며 지냈다. 가진 것 많지 않아도 행복하게,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지 스스로 경험해 보았다.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거나 잡아서 먹었다. 불필요한 것을 남길 생각도, 남겨서 돈으로 환산해서 재산을 늘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되려고 노력했다. 180여 년 전의 이야기라서 지금은 맞지 않는다고? 그가 담담하게 기록한 생활을 따라가면 안분지족, 무소유, 이런 단어들이 절로 떠오른다. 미니멀 라이프의 또 다른 이름은 결국 검소한 삶이 아닐까.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하는 기안 84라는 웹툰 작가가 있다. 이 사람은 자기 세계가 뚜렷하다. 뚜렷하다 못해 기인 같기도 하다. 보통 관찰 카메라를 설치하면 다들 그럴듯하게 자기를 포장하느라 바쁜데 기안 84는 그런 것이 없다. 날 것의 모습 그대로다. 본능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사람. 그런 그를 놀리는 자막으로 간혹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란 수식어가 붙는다.



우린 모두 인식하고 살진 않겠지만 (또는 인정하기 싫을 수도 있겠지만) 태어난 김에 산다. 그게 맞다. 아무도 정자, 난자일 때 내가 꼭 사람으로 태어나 멋지게 살다 가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는다. 부모의 결정으로 태어날 뿐이다. 어느 나라에서 누구의 자식이 될지 태어나기 전엔 알 수 없다. 그러니 태어났으니까 산다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나.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라는 자막을 보며 낄낄대었지만 웃을 일이 아니다. 태어날 때는 (당연히) 이상과 명분이 없었지만 어른이 되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우리 모두 미래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해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소로가 월든 호수에서 살았던 것처럼 자연 친화적으로, 가진 것 별로 없이도 마음의 풍요로움으로만 살아갈 자신은 아직 없다. 가진 것을 쉽게 내려놓지 못할 범인인 나는 그처럼 무소유의 정신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진 못하겠다. 아직 더 많은 것을 위해 돈을 쓰고 싶은 용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망가지고 매년 재해가 발생할수록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 또한 늘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태어난 김에 사는 것이라고, 지금처럼 편리만을 취하는 생활을 자유의 이름으로 향유하는 것이 올바른 삶일까 의심한다. 툰베리처럼 앞에 나가 사람들을 설득하지는 않더라도 환경 운동은 언제나 참여할 수 있다.

미래의 지구와 생활환경이 망가진다고 할 때면 솔직히 내 삶이 달라질 것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부모인 나야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다. 그저 환경 보전에 대한 많은 교육과 캠페인으로 어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이를 떠올리면 미안하고 안타까운 생각과 걱정이 앞선다. 아이에게 물려주어야 할 아름다운 미래는 과연 가능할까?


빌려 쓰는 지구라는 슬로건을 보며 참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단 생각을 했었다. 누구나 잠시 머물다 가는 이곳 지구, 우리 모두 충분히 보존해서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의무가 있다. 명분이 너무 거창하고 나와 상관없는 것 같다는 마음이 든다면, 작게 그리고 다분히 이기적인 마음이어도 좋다. 적어도 내 아이를 위해서라는 생각을 해 보면 마다할 부모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태어났으니 살아가야 할’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진정한 자산은 고가의 부동산이 아니라 잘 보존, 보호된 자연이다.


*2021년 11월 월간 에세이 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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