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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휴가

by nay

아내는 동료들과 회식 겸 스크린 골프를, 아들은 이른 저녁을 먹고 학원에. 습한 날씨 탓에 어지간하면 버티려다가 일 년 만에 잘 작동하는지 궁금하다는 어쭙잖은 핑계를 대고 에어컨을 틀었다. 집안은 고요하고 시원하고 바깥과는 단절된 완전한 분리 상태. 소파에 기대앉아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이 완벽하다. 홀로 있는 이런 기회가 얼마만인가 싶다.


문득, 완벽한 휴가를 떠올려 본다.


일단 나 혼자 보내는 휴가여야 한다.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의 존재는 소중하지만 적어도 ‘완벽한’ 휴가는 온전히 나의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 스케줄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한다. 왜 거기 가서 내내 방에만 있었느냐, 유명한 음식 먹으러 가지 않았냐 따지지 말지어다. 잠은 습관 상 일정하게 자고 일정하게 일어나겠지만 느지막이 일어나든 저절로 눈이 떠지든 상관없다. 그저 침대 바깥으로 발을 내딛는 건 내 마음이 원할 때다(하지만 화장실이 급해서 일단 침대를 벗어나야 할 수도 있다). 쫓아올 것도 없고 좇을 것도 없다. 온전하게 하루가 다 내 것이어야 한다. 창문 바깥만 멍 때리고 있어도 괜찮다. 창문 너머 풍경이 바다 거나 산이면 좋겠다. 도시 풍경은 나쁘지 않지만 낮에는 좀 그렇다. 밤에는 오히려 도시의 풍경이 더 나을 것이다. 적당히 시원해서 춥거나 덥지 않은, 얇은 긴팔이 어울리는 그런 날씨라서 마음 내킬 때 산책하는 것이 부담 없어야 한다. 돌아다니다가 어디든 앉아서 쉬어도 좋다. 나 빼고 다들 바쁘게 일하는 모습, 어디론가 오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그래도 도심의 복잡함 보다는 한적한 장소가 더 낫지 싶다.


휴가는 돌아갈 곳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완벽한 휴가는 내 일자리가 남아 있을 때 가능하다.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백수의 삶이니까 말이다. 글자 그대로 쉼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회사에서 오는 메일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될 여유가 있어야 한다. 완벽한 휴가의 시퀀스에 단 1초라도 회사를 떠올리는 것은 죄악이다. 아예 회사 메일 앱을 지워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애초에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막아야 한다. 맛있는 음식이 곁들여지면 더할 나위 없지만 어지간히 맛없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술은 안 먹으니 필요 없고 대신 책이 있어야겠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상관없다. 너무 많으면 부담이 있으니 적당히, 한 서너 권 정도가 좋겠다. 만화보다는 활자로 된, 깊은 사색보다는 머리 한 구석 털어낼 수 있는 내용이면 좋다. 책을 보다가 (당연히) 잠이 쏟아져 소파에 기대 잠시 오수를 즐기기 좋은, 침대 같은 소파가 방에 있어야 할 것이다. 몇 장 안 봐도 죄책감은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이건 휴가니까. 나란 남자, 휴가에도 독서를 즐기는 그런 남자의 이미지만 가져가도 나쁘지 않다. 내 마음 가는 대로 할 일이다. 그리고 아마도 밤이 되면 스탠드 불 하나 켜놓고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아내는 내향적인 나의 성격을 탓할 때가 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눈치다. 여러 사람과 어울릴 때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있는 반면, 혼자 자기만의 동굴을 찾아들어 갔다가 나와야만 충전이 되는 사람이 있다. 전적으로 후자에 속하는 나이기에, 내가 꿈꾸는 휴가의 정점은 ‘나’ 중심일 수밖에 없다. 그래야 한다. 가끔 월차를 쓰고 집에 있는 하루가 있다. 아내가 오늘은 쉬어서 좋아? 이런 질문을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아침에 출근하고 등교하는 처자식을 챙겨 보내고 나면, 집안일이 줄지어 눈에 들어온다. 집에 있다 보면 눈에 띄는 먼지를 그냥 지나칠 수 없고 다 마른빨래를 건조대에 그대로 둘 자신이 없다. 바지런하게 몸을 움직여 잘 정돈된 모습이 좋으면서도 아무래도 그건 ‘나를 위한 시간’을 반납한 셈이기에 아깝기 마련이다. 완벽한 휴가를 위해서는 반드시 누가 와서 대신 청소하고 정리해 주는 호텔로 가야겠다.


Unknown.jpeg 신이나신이나엣헴엣헴신이나 (출처: 자이언트펭 유튜브)

상상만으로도 신이 나 마구 써내려 가다가 고갤 들어 시계를 보니, 아이쿠 아이가 올 시간이 다가온다. 잠시 완벽할 수 있을 것도 같았던 혼자만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 바라 마지않는 완벽한 휴가의 전형을 조금 맛본 달콤한 찰나와 이별을 할 때 - 즉 현실로 돌아와야 할 순간이다. 그러나 이렇게 망상과도 같은 꿈을 꾸고 나니 글쎄 기분이 좋아졌다. 완벽한 휴가를 당장 가질 수는 없겠지만, 아니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싶지만, 적어도 뇌의 착각을 일으켜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는 가져봄 직 하다. 오늘처럼 비가 가득한 날에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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