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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Jul 21. 2023

상사의 ‘하지 마’, 그다음 질문의 가치.

최근 파트 내 인원 이동과 휴직까지 겹쳐서 물리적인 일손이 갑자기 줄었다. 그래서 새로운 일감을 마지못해 받아 들어야 했다. 내 손으로 받았으니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일이다. 뭉갤 수도 없고 어떻게든 답을 찾거나 줘야 하는 상황. 누가 할까를 고민하다가 퍼뜩 떠오른 것은, 회사 출신의 대학 교수를 이용하는 용역 연구였다. 우리 일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뿐 아니라 빠르게 결과를 (그것도 싼 가격에) 얻을 수 있기에, 이거다!라는 생각을 했다.


담당자들 및 교수님과 어느 정도 입을 맞춘 후, 보고 상황을 생각하니 최종 보스인 연구소장님이 남아 있었다. 그를 만나 상황이 이러저러하고 숙제가 요래조래해서 바깥에 맡길게요, 이렇게 말했다. 흔쾌히 그렇게 하라, 할 줄 알았는데 대뜸 안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비슷한 사례가 작년에도 있었는데 그땐 비용의 문제라고 판단했었다. 이번 건은 그보다 더 저렴한데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게다가 가끔씩 회의 자리에서 루틴한 업무는 바깥에 맡기라던 말은 무엇이었나?


여기서 '안된다'는 말을 듣고 네, 알겠습니다 하고 곧장 밖으로 나와서 대체 왜 안된다는 거냐며 화만 내면 그건 하수.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질문은 이유가 뭡니까.. 가 아니라 다음과 같았다.


”그럼, 어떤 일을 용역으로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 하나 덕분에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내부에서 할 일과 외부의 힘을 빌려할 일을 그의 관점에서 "정의"해 두고 있었다. 문제는 그 정의에 대하여 혼자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 우리에게 말하던 용역 연구 활용에 대한 명분과 이유가 나의 이해와 극명하게 달랐다. 심하게 얘기하자면 완전히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거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이후는 설득의 영역인데, 설득을 하려고 노력해야 할지 수긍하고 돌아설지는 온전히 내 의지와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확고해 보여서 추가적인 논의는 멈추고, 대신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다시 한번 정리하고 자리를 끝냈다. 동의는 아니고 이해라는 이름의 마무리.


나름 고민해서 솔루션을 들고 갔는데 상사가 안된다고 하면 의아하고 화가 나기 십상이다. 그러나 화내고 싫어할 것보다,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 우선 기본적으로 상사가 절대선이라던가, 흔들리지 않는 기준점이라고 바라볼 이유는 없다(은근히 그런 기대를 하는 구성원이 많다). 그도 사람이고 자기 생각이 있으며 아쉽게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결심이나 철학이 흔들릴 수 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구성원 입장에서는 주어진 상황에서 필요한 점을 잘 캐치하고 같은 일로 괜히 혼나거나 질책받지 않게 주의하면 된다.


최근에 우아한 형제의 CCO인 한명수님 강의를 들었다(우리 회사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라서 약간 부담스럽긴 했다).

의사결정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 그의 경험과 답변이 꽤 공감되었다. 디자이너들이 시안을 가져올 때, 분명히 ‘안될 것 같은 작품'도 은근슬쩍 가져온단다. 그걸 잘 걸러내되 실망하지 않도록 피드백하는 과정들이 즐겁다고 했다. 그의 말을 따르면 디자이너들도 일부러 그런 행동을 통해 어디까지는 되고, 어디까지 안되는지 알아 가는 것이라 했다. 요즘 들어 계속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내린 회사 일의 정의는,


-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생각 차이를 확인하고

- 필요하다면 조정하고

- 어떨 때는 억지로라도 따라오게도 만들고

- 때론 내 것이 틀렸구나 인정하기도 하는,


그런 과정들의 정반합을 통해 하나의 프로덕트(과제 또는 제품)를 완성하는 것이다. 예전엔 회사 일이란 그저 일 자체, 목표만 달성하는 것 자체로 이해했는데, 이제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소장님과의 작은 논쟁 상황이 은근히 즐거웠다. 아, 그렇구나, 그는 이런 일을 이렇게 바라보는구나.


잘했다고 칭찬하고 싶은 것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듣고, 다시 내 언어로 정리해서 재차 확인했다는 것이다. 까인 건 까인 거다. 어쩌겠는가? 물론 내가 더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그를 설득하고 내 판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일 터지만, 아직 그럴 역량은 부족하다. 비록 원하던 결과인 일감 덜기는 실패했지만 상사의 생각을 파악한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안되는 것에는 자책, 실망 또는 분노하기 전에 이유를 묻자. 왜 그런지 알아내는 작은 노력, 그게 우리를 성장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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