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자료를 뒤져 볼 일이 있어 입사 초기부터 2015년 정도까지 모아둔 파일을 꽤 많이 열어 보았다. 딱 필요한 건 검색어를 써서 특정 파일만 골라내는 것이었지만, 그에 맞지 않는 것들도 많다 보니 본의 아니게 (거의) 전수 조사에 들어간 셈이다. 원래 뭘 버리려고 하다 보면 과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전혀 다른 사물이 방해한다. 필요한 파일을 찾는 작업과 별개로 예전에 만들었던 결과물을 열람하는 기회 덕분에 과거로 여행을 잠시 다녀왔다.
그런데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예를 들면 제목이 ‘의뢰 평가 실패율’인 것이 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 열어 보니 다른 부서에서 우리에게 효능 평가를 의뢰했던 소재들 총 개수 중, 의미 있는 결과를 얻었던 사례들이 몇 % 정도인지 계산해 본 것이다. 단순하지만 통계를 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종합적인 데이터 분석은 지금도 하는 일이다. <평가 의뢰 양식> 같은 것도 발견이 되었다. 3년 전 연구소 복귀 후 현업을 맡았을 때 나는 당연히 이런 것이 필요하겠군, 하면서 내용을 구성하고 양식을 배포했다. 십수 년 전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양식을 만들고 상대방에게 요구했다니! 전혀 기억도 못하고 있던 곳에서 과거와 현재의 내가 조우하고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소름이 끼쳤다. 과제 제안서라던가, 결과를 분석하고 기록하는 방법이나 내용면에서 십몇 년 전의 나와 2023년의 나 사이에 큰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좋게 보자면 이미 오래전부터 일하는 방식이 형성되었던 것이다(완성형에 가까웠다는 아주 극단적인 자기 만족도 가능하다).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사람이고, 일을 처리하는 방법론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늘 내가 일하는 과정에서 성장해 왔다고 믿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과거에는 더 까칠했지만 지금은 상황을 조망하고 다른 부서나 사람의 입장도 함께 살필 줄 안다. 여러 사람과 다양한 관계를 형성할 줄 알고, 어떻게 하면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분명 달라진 건 있다. 그런데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라던가, 디테일하게 처리하는 상태를 보니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심 사소한 것도 잘 챙기는 부분이 내가 생각한 발전적 모습의 하나라고 인식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이 발견은 솔직히 나를 기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동안 성장에 대한 믿음이 착각은 아니었나, 지나치게 자기 편애에 가까운 오해는 아니었던가 의심하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 일을 해 오면서 일처리를 더 잘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 거짓처럼 생각되었다.
좌절할 수는 없다. 좀 더 파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즉 일터에서 성장한다는 것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지 중요하지 싶어졌다. 업무의 디테일에서 성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시야의 획득과 같은 관점의 개선으로 성장을 얘기할 수도 있다. 새로운 도전 속에서 성장을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나 자신이 성장했다는 믿음이나 느낌을 가졌던 때를 돌아본다. 곰곰히 생각하니 인사이동, 직무 이동과 같이 큰 변화가 있었을 때라는 결론에 이른다. 조직과 직무를 바꾸는 일은 때로는 타의에 의한 것이었지만, 어떤 것은 내가 격렬하게 원했던 결과이다. 비슷한 일을 했더라도 전혀 다른 팀과 상사 밑에서 새롭게 일을 배우면서 결과를 기록하는 중요성을 깨달았다. 조직장을 스태핑하는 일을 하면서 실무에선 멀어졌지만 여러 부서의 이해관계에 더 익숙해질 수 있었다. 해외로 발령이 났을 땐 글로벌 마인드셋을 갖추는 좋은 기회였고, 익숙하지 않은 분야를 개척해야 할 땐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이벤트가 큰 만큼 인식되는 정도의 차이가 커서, 더 강력한 인상을 남기기 쉽다. 어쨌든 익숙한 일을 편하게 처리하는 과정에서 작은 디테일을 더 챙기는 것도 분명히 성장의 기회가 되지만, 한 단계 점프업 하는 기회가 되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변화와 함께 도전적 상황이 주어지고 여기서 버티는 과정 속에 성장과 성숙의 기회가 있다.
그런 결론에 이르자 어째서 계속 무언가 바꾸고자 했었는지 이해가 된다. 이런 시도는 나를 안주하지 못하게 하는 동기이자 원동력이다. 20여 년쯤 한 회사에서 지내다 보면 어디 가서 짱 박혀 지내면 편한지 알 수 있다(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런 곳은 없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위기감을 느끼는 이유는 정체된 내가 만족스럽지 않아서다. 별 볼 일 없는 뒷방 늙은이가 되는 것이 스스로 안타깝고 싫어서일 것이다. 경험이 가르쳐 준 교훈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