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분히 안정지향적인 사람이다.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지 않는 편이다. 처음 보는 것에 궁금증도 적고, 딱 정해진 것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부분에 장점이 있다. 그러니 모험심을 가지고 새로운 사업에 뛰어든다던가, 전혀 다른 분야의 업무로 돌진해 볼 생각은 잘 없었다. 할 줄 아는 것을 더 잘하려고 하던 과정과 결과 속에서 성공해 왔다고 믿었다. 입사 이래 10여 년 동안 체득한 ‘나만의 일하는 방식’에 대한 믿음은 타인(상사)의 의지 덕분에 깨졌다. 그분이 준 역할을 시작하면서 성격은 비슷하지만 주제가 다른 분야의 일을 맡았다. 처음에만 해도 화가 났는데 궁극에는 어쩐지 안정 지향적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의외로 나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환경과 업무가 주는 긴장 속의 설렘 있었다. 새 일을 배우며 기존에 몰랐던 관점, 다르게 일하는 방식, 여러 부서 사이의 관계와 이해관계를 알아가는 것의 재미를 알아 버렸다.
물론 새로운 일을 맡을 때의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연구 분야가 생소하든, 애초에 없던 분야든, 내 선임이 있었던 빈자리든, 새로 만들어진 조직의 일원이 되든 마찬가지이다. 적응에는 시간이 걸린다. 역할이 달라진 것을 핑계 삼아 잠깐 허니문을 가질 순 있어도 별로 여유롭지는 않다. 시간뿐이랴? 노력이란 단어가 빠질 수 없다. 동료에게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제 몫은 해내려는 의지의 발현이 필요하다. 그렇게 나와 맞는지 아닌지 간을 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조금씩 이해하고 일을 파악한 뒤,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으면 그야말로 성공이다.
그러나 하다 보니.. 아니, 하면 할수록 ‘내 일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면 조바심과 걱정을 벗어나기 어렵다. 지금의 업무는 정작 나와 잘 맞는 성격의 업무였지만 이상하게도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있음을 지난 1년 동안 알게 되었다. 타고난 나의 일처럼 보이고 남들도 인정해 주는데, 성격상 잘할 수 있는 일임에도 업무를 하면 할수록 불만이 쌓였다. 더 이상 성장할 기회를 발견하지 못할 상황이 싫어졌다.
안정적인 상황은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있으면 잘할 것 같지만, 이대로 굳어질까 싶어지는 그런 기분. 여러 사람이 물었다. 왜 옮기려고 하느냐고. 밸런스 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가 즐겁지, 균형 잡는 요령을 숙지하여 멀뚱히 서 있으면 더 이상 재미가 없는 것처럼. 안정적인 상황의 불안함이 되려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일을 즐길 준비가 되었는가? 완벽한 또는 완전한 준비는 결코 찾지 못할 환상 속의 동물과 같다. 예의 불안정함 속에서 조금씩 잦아드는 파도에 몸을 맡겨보는 때가 역설적으로 안정적인 순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