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y Oct 11. 2023

남의 커리어 따위.

회사에 들어온 지 채 2년이 안되었을 때다. 갑자기 경력개발 계획을 짜라며 앞으로 3년, 5년, 10년 후 내 모습을 각자 작성해서 내라는 요청을 받았다. 뒤져보니 지금도 그때 인사팀에서 받은 경력개발 안내 작성 가이드가 있다. 희망하는 목표 시기와 직무를 쓰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실제 작성은 인트라넷에서 해야 되었으므로 내가 뭐라고 적어 냈는지 알 수가 없다. 대충 몇 년 뒤엔 섹션 리더, 몇 년 뒤엔 팀장 요래 적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2년 차가 뭘 안다고 그걸 호기롭게 적어냈나 몰라. 아무튼 왜 했나. 선언 효과라는 것이 있으니 목표가 정해지면 그걸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이라는 야심 찬 조직 문화 개선의 이유가 있었겠지 싶다(아니면 높으신 누군가가 어디서 듣고 와서, 요즘 HR은 이런 걸 해야 한답니다 하고 보고한 결과물일 수도 있고). 그때 적었던 목표의 일부는 달성하고 일부는 못했는데, 지금도 경력 관리라고 하면 여전히 막연한 구석이 있다.


20년 정도 직장에서 일을 해오면서 좋았던 것, 안 좋았던 것, 따지고 보면 많다. 요즘 들어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아보자면 ‘나의 커리어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부른 소리인 줄 안다. 자기 경력 관리도 어려운 마당에 남의 커리어에 누가 신경 쓰겠는가.


그러나 상급자라면 잠깐이라도 함께 고민해 주는 시간 정도는 할애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슬쩍 바로 상위 직급자인 팀장에게 ‘요즘 커리어에 고민이 많아요’라고 말했다. 그때는 실제 그렇기 때문이고,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반응하나 궁금하기도 했고, 진정성 있는 답을 주려고 애쓰는지 알고 싶은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 여러 가지 목적이 모여서 단 하나의 문장으로 표출된 셈이다.


훅치고 들어가서였나. 

돌아온 그의 답은 실망스러웠다.

'나도 그래'


비슷한 연차에 당연히 팀장 역시 고민이 없을 수 없는 내용이기에 <아프냐, 나도 아프다> 정도의 말로 충분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기 팀의 고연차 직원이 그런 말을 왜 꺼냈는지 호기심을 가지는 것이 그리 어려웠을까. 그를 변호해 보자면 분위기 상 맥락이 없었던 것도 있다. 이러쿵저러쿵해도 팀장이 보인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나는 더 이상 이 주제를 이어가지 않았다. 그는 공감의 행위였을지 몰라도 당사자인 나는 공감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는 상무님과도 커리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예전에 싱가포르 파견 지원서를 냈을 때 적극 응원해 준 사람이다. 누구나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면 막을 생각 없다는 입장. 후배 입장에서 ‘거기 왜 가려고 하느냐, 쓸데없는 일 한다’고 핀잔이나 눈치 주는 상사보다는 응원하고 손뼉 쳐 주는 사람이 훨씬 고맙고 좋게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랬는데.. 그땐 그랬는데, 어쩐지 최근의 대화에서는 뭔가 앙꼬 빠진 찐빵 같은 대화였다. 나의 입장과 선택을 존중해 주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그래도 오랫동안 부대껴 온 자기 조직의 부하에게 상사로서 무책임하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아, 결국 나는 별로 챙겨주지 않는 사람이구나 이런 느낌도 언뜻 받았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그러나 난 두 상사에게 상처받지는 않았다. 실망하지도 않았다. 약간 서운할 뿐이지. 어차피 그런 것이다. 남의 커리어 따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