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부서로 옮긴 지 2주가 지나갔다. 연구소에 있는 부서지만 기존의 업무와 확연히 다르다. 연구 자체가 아니라 연구개발의 결과물을 시장에 잘 맞추기 위해 - right time, right place - 고민하고 실행하는 부서를 새로 만들었다. 이를 위해 외부에서 임원이 들어왔다. 같은 목적의 일을 하기 위해 모인 다른 사람들을 알아가는데 들인 시간은 잠시. 함께 속한 전략 부서의 일하는 방식, 특히 속도에 적응하는 시간을 보냈다. 왜 이렇게 급해? 하는 생각조차 불필요하게 될 정도로 이제는 맞춰지는 기분이다. 몸 대신 머리만 종일, 주야장천 쓰는 일이라서 그런지 되려 더 피곤하고 달달한 간식을 더 찾게 되었다.
전략 업무라는 걸 대략 10여 년 전에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짧게 해 봤던 기억이 있다. 이런 종류의 일은 연구자 마인드를 가진 내겐 이질적이라 흥미롭지만 연구개발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에겐 보통 쓸데없는 일, 현실적이지 못한 일로 치부되기도 한다. 말만 그럴싸하거나 일을 위한 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실제 그런 성격의 업무이기도 하니 스스로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치장하고 단어 하나 고르는데 고심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에, 나중에 지나고 보면 '뭐 하는 건가' 싶은 반성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그럼에도 자괴감에 빠지지 않는 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조직이 가져야 하는 운영의 체계를 만드는 일이라서 그렇다. 제품을 만들고 개발하는 실무자들에겐 관심 없고 성가신 영역이지만, 회사라는 시스템이 잘 돌아가려면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업무가 필수불가결하다.
굳이 그걸 왜 내가 하겠다고 나섰는가? 무슨 대단한 결심이나 욕심이 앞서서가 아니다. 새로운 임원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이다. 부서를 바꾸고 싶어, 다른 일을 하고 싶어, 이런 생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새 임원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글로벌 회사에서 임원을 지냈던 사람의 곁에서, 그녀가 했었다는 바로 그 일을 배우고 익히며 수행해 볼 수 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가 될 것이다. 물론 회사에서 외부 회사의 임원을 데려왔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어 걱정이 없지는 않다. '어디 한 번 해보슈'하는 긍정적 시각과, '내 것은 지킨다'하는 보수적인 마인드가 충돌하는 곳이 회사이다 보니, 다들 몇 년 제대로 활약하지도 못한 채 떠나고 말았다. 커리어 리스크를 안은 채 내 한 몸 맡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어리석기를 바란다. 그래서 난 그녀가 부디 잘 정착하기를 바라는데, 결국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잘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인 현실이 흥미진진하다. 아직 본격적인 일을 도모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문화에 익숙하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던지는 질문들이 나를 깨우치게 한다.
직전에 근무했던 부서가 조직 변화의 중심에 있다 보니 무언가 변화가 예상되고 있고, 그 와중에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보다는 남들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쓸려 다닐 우려가 있다. 조직의 논리와 결정은 모든 사람을 하나하나 배려할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선 차라리 죽이 되는 밥이 되든 나의 의지를 가지고 이동한 현재가 훨씬 바람직하게 생각된다.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오랜만에 해보는 전략 부서의 일이 반가운 것은 남들의 부탁 들어주기 바빴던 기존의 일과 확연히 다른 성격이어서도 있지만, 어쩌면 내가 판단하고 결정한 사안에 대해 '맘에 안 들면 어쩔 건데?' 하는 불안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걸 부정하면 모든 게 흐트러진다. 나의 판단이 그르면 안 된다는 자기 최면, 정당화의 이유가 부디 기우일 뿐으로 드러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