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없는 말부터 하겠다. 적어도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남들에 비해 대단히 뛰어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남보다 못하다고 여긴 적도 없었다. 초기부터 순탄하게 인정받았다. 특진도 해봤고 성과에 대해 발표를 통해 보상 받을 기회도 종종 있었다. 진실로 노력하고 잘해서 칭찬을 받은 것도 있고 그저 그랬는데 남들에 비해 빛나는 순간에 우연히 있을 때도 분명 있었다. 대게 평판이란 상대적이라 객관적인 능력을 파악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러니 회사 이름과 직책을 떼고 순수히 '나'로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눈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름 메타인지가 잘 되어 있다고 믿어왔다. 때로는 자기 객관화가 지나친 건 아닌가, 이런 자조적인 생각들에 빠질 때도 있었다. 이제와 찬찬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보통 자기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까닭에)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방어기제였을 수 있다. 남들 앞에서 겸손한 척, 아유 능력이 부족하죠..라고 말할 때 정말 그렇다고 인정하는 면도 있지만, 실은 난 못난이가 아니지라는 생각은 늘 기저에 깔려 있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남보다 못하다고 여긴 적 없으니까.
그런데 최근 몇 달간 진짜 내 능력이 이 정도인가 싶은 수준에 닿은 순간순간들이 나를 괴롭혔다. 연구 중심의 조직에서 약간의 행정적 센스를 발휘하는 것은 ‘남들과 다른 차별성’을 보여주곤 했다. 그게 나의 강점이었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였다. 주변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100% 행정적인 일만 하는 부서에 오니, 나에게 부족한 점이 한둘이 아니란 걸 깨닫는 시간이 자주 찾아왔다.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아서 감정적으로 피로해졌다. 남들에게 말 못 할 고민이 쌓였다.
타이탄은 100퍼센트 확률로 성공합니다. 될 때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실패는 끝이 아니라 경험일 뿐이고,
‘나는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지금의 자리에 오도록 큰 동력이 됐기 때문이죠
(폴인-TBWA 유병욱이 고른 책, 타이탄의 도구들에 대한 소개 내용 중에서)
이전의 나에겐 운 좋게 항상 주어진 과업이 있었고, 그걸 달성하는 최적의 방안을 찾는 것에 익숙했다. 가야 하는 방향이 정해져 있어서 어떻게 그걸 완수할 것인가라는 작업에 집중하면 되었다. 쉽게 말하면 대게 정답이 있는 일을 해왔던 셈이다. 항상 정답을 잘 찾아낸 건 아니었지만 틀과 방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일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적당하게 짱구를 굴려야 하는, 작은 귀찮음의 경계를 그럭저럭 넘나드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전략 업무라는 건 정의되지 않은 모호한 또는 구체화되지 않은 것을 현실 세계로 끌어내려 구현해 내는 작업이다. 내 역량은 당연히 여기에도 닿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지 않게 느껴진 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실제 역량이 부족하거나 일 자체에 익숙하지 않거나. 상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 보고, 옆 사람을 슬쩍 보며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나의 결론은 20년의 개인 역사가 만들어 준 직업적 서사의 가치를 깨야할 시점이란 것에 이르렀다. 위대한 타이탄들처럼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갖는 사람은 아니다. 그저 그동안 공고히 쌓아 온 나만의 성공 방정식에서 탈피해야 하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익숙함을 버리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알기에 오늘도 상사와 얘기하다가, '제가 그동안 이런 방식에 너무 익숙했나 봐요'라고 했다. 어찌 금방 바뀌겠는가. 조금 더 노력하며 경험해 보기로 해본다.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얻기는 지금 너무 이르다. 내겐 더 확실한 경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