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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질문이 가장 어렵다

by nay

애플은 독자적인 규격의 8핀 단자를 개발해 오랜 시간 동안 자사만의 규격을 고수해 왔다. 애플 기기만 사용한다면 그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겠지만, 범용적인 충전 환경에서는 취약한 점이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거의 표준에 가까운 USB-C 타입으로 변경되었다. 표준을 따르는 것이 기술적 독자성을 잃는 일이라 아쉬워할 수도 있겠지만, 사용자 입장에서는 두 손 들어 환영할 만한 변화다. 더 이상 다양한 충전 단자를 따로 챙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당연한 시대지만, 예전에는 집에서 영화 한 편을 보려면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야 했다(지금은 '그거요? 박물관에서 본 적 있어요!'라는 세대도 있을 정도다.). 영상을 저장하고 재생하는 매체로서 비디오테이프가 자리를 잡던 시절에 있었던 포맷 전쟁에서의 승자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누가 이겼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왜’ 이겼는지는 처음 알게 되었다.


새로운 산업이 시작하는 시기엔 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포맷이 표준이 되는지, 그리고 누가 그 표준을 주도하는지가 중요하다. 당시 시장에는 VHS와 베타맥스라는 두 포맷이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베타맥스는 ‘기술의 소니’라는 수식어를 가진 소니가 밀던 포맷으로, 당시 기준에서도 화질이 뛰어났다고 한다. 반면 VHS는 JVC에서 개발한 포맷으로, 화질이 떨어지고 재생 중 정지하면 화면에 하얀 줄이 생기는 단점도 있었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베타맥스가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으로 우수했던 소니의 베타맥스가 패배하고, VHS가 시장을 장악한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사용자들이 가장 원했던 기능은 ‘운동 경기 녹화’였다. 베타맥스는 화질은 우수했지만 한 경기 전체를 녹화할 만큼의 긴 재생시간을 지원하지 못했다. 테이프를 중간에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던 것이다. 반면, VHS는 화질이 다소 떨어져도 경기 전체를 한 번에 녹화할 수 있었고, 영화도 한 개의 테이프에 모두 담을 수 있었다. 결국 사람들은 더 편리한 쪽을 선택했다. 좋은 화질은 감동을 줄 수 있지만, 당시 고객의 선택 기준에서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셈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 시대에는 화질 부족이 그리 큰 단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브라운관 TV의 하드웨어 한계 때문에 고화질의 의미 자체가 희미했기 때문이다. 결국 기술적 우위보다 VHS가 제공하는 실용성과 편의성이 고객에게 더 크게 다가갔다. 물론 VHS가 표준이 된 데에는 다른 이유들도 있었겠지만, 내게 가장 와닿았던 이유는 이 점이었다.


기술의 한계를 넘어서고 우위를 추구하는 데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상업적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어디를 들여다봐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누가 고객을 이해했는가 – 단순한 질문의 힘

하나의 제품이 탄생하기까지의 연구개발 과정을 오랜 시간 지켜보고 직접 참여도 해 왔다. 나 역시 기본적으로는 연구자 성향이 강해서 기술은 무엇보다 첨단이어야 하고, 새로워야 하며,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믿음을 오래 가져왔다. 실제로 특정 분야에서는 기술적 완성도가 시장을 압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에서는 기술력이 반드시 게임의 승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배워 왔다. 어떤 기술은 작지만 결정적인 차이로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단지 사용법이 간편하거나 포장이 고객 친화적으로 바뀐 것만으로 시장에서 앞서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도 기술이라면 기술이지만, 본질은 고객의 요구를 정확히 해소했다는 점이다.


이 말은 어떤 연구자에게는 불편할 수 있고, 나 자신에게도 뼈아픈 질문일 수 있다. 내가 만든 기술이 과연 고객에게 진정 필요한 내용인지, 되묻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주 단순하지만 가장 강력한 질문이기도 하다.


고객은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그 기술이 내게 어떤 경험을 주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최근에 과제를 제안하려 고민 중인 동료와 대화를 나눴다. 그는 “이건 정말 기술이 다르다”고 강조했는데, 나는 오히려 '시장에 이미 다른 대안들이 충분히 있는 것은 아닌지' 물었다. 기술 자체의 매력보다는, 고객의 문제를 더 쉽고 빠르게 해결하는 게 우선인 시장에서, 단지 '다른 기술’이라는 말은 설득력을 잃기 쉽다. 과제를 진행하려면 그런 점을 보완할 준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물론 고객의 니즈와 고충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혁신적인 기술이 전혀 다른 경험을 줄 수 있다면 그건 집중해서 개발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연구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말 이 기술이어야만 하는가?”, “다른 해결책은 없는가?” 그런 점을 끊임없이 반문하면서 시간과 자원의 투입을 정당화해야 한다. 단순히 돈이 들어갔고, 시간이 들었고, 애정을 쏟았기 때문에 밀어붙이는 건 자칫 개인의 만족으로 끝날 수 있다.

이제는 너무 뻔한 질문일지 모르지만, 다시 한번 되물어야 할 질문.


“당신은 고객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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