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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대훈 Nov 2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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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죽음


 

모든 인간은 우연히 태어나 갑자기 죽는다. 그토록 갑작스러운 순간에 놓였을 때의 나를 생각하며. 이따금 나는 하염없이 걷는다.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한다면 무슨 죽지 못해 사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매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정확히는 어떻게 하면 기꺼이 죽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나는 기꺼이 죽고 싶다. 썩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말하며 죽고 싶다. 개운하게 미소 지으며 죽고 싶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하는 것과 같다. 마냥 잘 살고 싶다거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아득하고 고요한 말보다 내게는 훨씬 실용적이고 묵직한 울림이 되는 질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멈춘 순간 삶은 서서히 죽음보다 못한 삶이 될 것이다.

  

내 생각에 진정한 성인(聖人)들은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늘 죽음에 대해 경건했고, 언제든 자신 삶에 찾아와도 이상치 않은 일이라고 낙관했다. 때로는 당장 눈앞에 죽음이 도사려 있음에도 외려 절망하기보다는 순수하고 용감했으며, 더 이상 사랑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남기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열정적으로 몰두했다. 나는 그런 이들을 보면 전율한다. 그리고 미치도록 동경한다. 미래를 걱정하고 스스로 불행해지는 것은 인간의 특기인데 말이다.  


만일 오늘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나는 어떤 표정일 지을까. 산책길에 괜스레 살기를 느끼며 나는 자문한다. 글을 더 쓰지 못해 아쉽다는 표정일까. 누군가를 진정 사랑하지 못해 후회하는 표정일까.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까 하며 두려워하거나 아주 조금 두근거릴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내면 밑바닥에서 뭔가가 울컥 차오른다. 새 숨인지, 묵은 숨인지 모를 무언가.  


이윽고 내 마음에는 더없이 매일을 열렬히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한 겹 입혀지고, 이 무슨 쓸데없는 상념인가 하는 회의에 균열하다가, 죽음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과연 내면의 양분이 되는가 아니면 피폐함을 재촉시키는가에 대한 의문이 그 위에 포개진다. 결국 답은 없다. 사는 데 까지는 살아봐야 알 일이다. 사는 동안 반복해야 할 질문들이다. 답이 있으면 그게 더 시시할 것이다. 


삶이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으므로 모든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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