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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대훈 Jan 2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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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순리     



이 사건은 없는 세계에서 벌어졌다, 아니 

빛과 어둠이 동시에 개벽하던 세계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맨발로 숲길을 걸었다, 이따금 벌레가 새끼발가락을 뜯어먹었다 

따끈따끈한 발바닥이 슬픔을 억누른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손끝에 자꾸만 추억이라는 다층의 함의가 

묻어났다, 손가락들은 기름처럼 흘렀다 

눈을 뜨자 세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탄생이라는 이력과 숨죽임이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특기는 의도적 병듦과 자연적 회복이며 성격은 정신분열이다

다리가 움직이면 푸른 공기가 떨었다 

발은 제2의 동공이다, 어디까지 왔나? 

옹골찬 소리로 나는 물었다, 모퉁이에서 

그야말로 비감이었는데 반나절 동네를 걷고 

진심은 그렇게 불쑥 느껴졌다 

백발 같은 겨울이 오겠지 

발이 비웃으며 말했고 나는 문득 은혜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더는 슬프자니 애매했고 피고름이 열심히 떨어지고 있었다

 

매일 연습했던 길

집으로 가는 길

구원받는 길 

지긋지긋한 길

희끗거리는 

유년의 발 


삶은 

모호한 우울에 시달리는 일이더군 

멀리멀리 가엾게 우리는 앞으로

더 살아가야 해

더 죽어가야 해

소박하고 사소한 것들은 잘 씻어 말려두고

또 서서히 잊는다 할지라도 

혹시 모르지 이 분열의 끝이 찬란한 잿빛이 될는지 

아 물론 진실은 두 겹 뒤에 있겠지 


태초에 

발이 있다

발이 있었다

발을 구르고 있다

발은 의기양양하다 

발은 찢어질 것이다

발은 사라질 것이다

발은 자연사하지 못할 것이다

발은 무책임할 것이다

 

오늘 나는 발바닥에 눈을 덕지덕지 묻히고

흙을 발랐다 


어느 날 나는 하얀 벤치에 매달려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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