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에 대하여>
고독 속으로 달아나기를 권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숲과 도시를 비교합니다. 두 장소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숲을 좋아한다. 도시에서는 살기가 어렵다. 욕정에 눈이 먼 사람들이 너무도 많으니. 욕정에 눈이 먼 여인의 꿈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보다 살인자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숲을 선호하며, 도시에 살기를 어려워합니다. 도시에는 욕정과 욕망으로 가득하고 동시에 살인자들도 득실거립니다. 숲에서는 욕정을 자극하는 요소가 드물고 홀로 머물며 자기 성찰과 자기 창조를 할 수 있습니다. 숲에 도사리는 위험이라면 도시에 속하지 못한 범죄자들의 무리가 있을 수 있으며, 그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치안이 갖추어져있지 않습니다. 반면 도시에는 경찰에 의한 치안이 유지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욕정을 자극하는 정신적 타락의 위험이 존재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육체적 죽음보다 정신적 타락이 더 끔찍하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최소한 짐승으로서 나마 완전하다면 좋으련만! 짐승에게는 그래도 순진무구라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짐승을 인간보다 낫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본능에 충실한 짐승의 순진무구(unschuldig)가 위선적 도덕을 내세우는 삶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순진무구는 '죄가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죄'는 나쁜 의도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로 짐승이 가진 자연스러운 본능과 달리 부자연스러운 계책으로 발생합니다. 인간이 자신을 극복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이성과 본능 사이를 방황하는 모습을 차라투스트라는 비판합니다. 어정쩡한 이성은 얼마나 본능 앞에 약할까요?
음욕이라는 암캐는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한 조각의 고기가 거절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한 조각의 정신을 구걸할 수 있는지를!
음욕(Unzucht)은 '다스릴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제할 수 없는 욕망은 물질적 결핍 앞에서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이것은 고난이 다가왔을 때 우리의 정신은 물질적 상태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유물론적 사고입니다. 배가 부를 때 우리는 긍지를 지키고 유혹 앞에 당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굶주림과 육체적 고통 앞에서 그것을 지키기는 힘듭니다. 우리의 주인이 정신이라면, 정신적 타락이 육체적 고통보다 늘 우위에 서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차라투스트라는 꼬집습니다.
깨달음에 이른 자가 진리의 물속으로 뛰어들기를 꺼리는 것은 그 물이 더러울 때가 아니라 얕을 때다.
차라투스트라는 더러운 진리에 뛰어드는 것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유혹 앞에서 주저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반응일 뿐, 흔들리는 우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유혹 앞에서 흔들리는 스스로에 대해 자책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순결'하게 흔들림 없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오히려 피상적 진리, 즉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단순한 도덕을 지키고자 하는 얕은 생각이 위버멘쉬와 거리가 멀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처하는 모든 상황에는 변수가 존재합니다. 각자의 이유로 변명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자신에 의해 왜곡된 현실 인식을 더러운 물이라고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으로 뛰어들어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가 위버멘쉬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네덜란드의 거장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약 1450- 1516)는 1490년에서 1510년 사이에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이라는 제목의 삼면화를 그립니다. 쾌락에 의해 타락한 세속적 세계에 대한 비판인지 혹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동경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왼편에서 오른편 순서로 에덴동산, 지상세계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작품의 왼편에는 에덴동산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보스는 수많은 상징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숨겨놓았는데, 에덴동산의 모습은 그동안 전해지던 순수함의 장소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림 전면에 위치한 혼탁한 물에서 기괴한 생명체가 기어 나오는 장면은 특히나 에덴동산에서 이미 순결함은 오염될 운명이었음을 드러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파격적인 장면은 에덴동산의 순수함과 모순되는데, 코끼리와 기린, 원숭이, 오리부리의 환상적 동물들이 당시의 여행 문학에서 영향을 받아 유럽의 세계관이 확장되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분석합니다. 그들이 알던 동물들로만 순수하게 구성된 에덴동산은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생명체들로 인해 이미 순수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몇몇 비평가들은 아담이 아내를 보는 시선에서 정욕을 이야기했고, 이는 인류가 태초부터 파멸의 운명을 안고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주장합니다. 중세에는 타락 이전의 아담은 순수하게 정욕 없는 번식을 위한 성관계만 나누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오른편의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에서는 순수하게 쾌락을 위한 행위들이 관찰됩니다. 세속적인 쾌락은 인간이 생식하고 세대를 잇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단순한 행위를 너머 유희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포함합니다. 보스는 태초부터 순결함이라는 것이 오염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고, 쾌락과 타락의 구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모든 쾌락이 타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으며, 때로는 쾌락이 창조를 통해 인간 존재의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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