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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l 14. 2024

카프카의 <변신> #13

불쾌한 아름다움 그리고 도덕과 책임

줄거리

그레고르의 세 신사에 대한 노출은 가족들에게 절망의 수용을 강요했다. 그들은 더 이상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아도 되는 하나의 용인을 받은 듯했다. 그들의 대화는 자기 자신들에게 하는 독백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이며, 이는 가족 구성원들 개개인과 가족 전체를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레고르는 개인의 죽음을, 가족들은 구시대가 저물어 감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는데…


아름다움을 지키는 새로운 방법

여동생 그레테는 가족들과 세 신사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음악은 단지 구경거리로만 그녀의 연주를 대했고 사실상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녀의 음악에 사로잡힌 이는 변신한 그레고르뿐이었다.


<그는 여동생이 있는 데까지 기어가서 그녀의 치마를 잡아당겨 그녀가 바이올린을 가지고 자신의 방으로 오기를 바란다고 표현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여기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처럼 그녀의 연주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적어도 그녀를 자신의 방 밖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의 끔찍한 형상은 그에게 처음으로 유용할 것이다. 그의 방에 있는 문들을 통해 공격하는 이들에게 흉한 몰골로 맞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강요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그의 옆에 머물러야만 할 것이다.>


그녀가 연주하는 아름다움은 누구에게나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어느 누구에게나'가 아닌 '어떤 이에게만'의 아름다움이다. 보편성의 예술의 시대는 저물고 개별성의 예술의 시대가 열린다. 개인의 내면의 미적 상태를 외부의 세계로 펼쳐내는 것을 '표현주의(Expressionismus)'라고 한다. 객관성보다 주관성이 미학적 측면보다는 심리적 측면이 훨씬 강조되는 이러한 사조는 대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의 '소외'의 감정을 잘 드러내어 준다. 독일의 표현주의는 자신의 안에 갇힌 내면의 외로움, 괴로움, 추악함을 드러내어 그것을 가진 사람들을 위안하는 해방의 움직임이다. 많은 이들이 내면에 간직하고 있지만 부정하고 싶어 하던 감정, 숨기려 하고 겉으로는 다른 감정을 가진 사람인 척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기만'에 반대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표현주의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이어진다. 이들의 예술적 업적은 아름다움의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데 있다. 아름다움의 순우리말의 어원이 '자기다움'이라는 말처럼 20세기 초반 서양의 미학에서는 이상적인 자신이 아름다움의 기준이었던 틀을 벗어나기를 시도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니체의 아모르파티(amor fati)의 미술이 등장했다.

왼쪽: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 1889 ;오른쪽: <부서진 기둥>, 프리다 칼로, 1944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정신적 문제로 인해 가장 친한 친구 고갱 앞에서 자신의 귀를 자른다. 이에 놀란 고갱은 그의 곁을 떠났고, 홀로 남은 고흐는 자신의 모습을 담담히 그린다. 그의 잘린 귀를 감싼 붕대는 숨기고 싶은 자신의 정신적 문제와 인간관계의 상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한편 프리다 칼로는 18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을 때까지 하반신마비를 겪었고 세 차례의 유산을 하는 등의 괴로운 삶을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비참한 삶을 적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으려 평생을 노력했다. 사랑받기를 간절히 바랐던 이 두 예술가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고 그들의 아름다움을 철저히 추함으로 가려 진정한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호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레고르가 그레테를 자신의 방에 가두고 싶어 하는 것도 자신만이 알고 있는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함 일지 모른다. 아름다움을 숭배의 방식으로 지키는 것이 아닌 결함과 추함을 드러내어 진정한 이해를 받고자 함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심리적 상처와 외적 상흔은 그것을 미리 겪은 이들의 모습을 감추는 것이 아닌 드러낼 때 격리와 소외가 아닌 사회적 포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포옹>, 에곤 쉴레, 1917

에곤 쉴레가 표현하는 그로테스크하고 적나라한 신체의 표현은 전통적 관점에서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나친 관능미와 퇴폐미를 지향하는 듯하다. 그의 미술을 통해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스펙트럼을 확장시킬 수 있다. 에곤 쉴레의 작품을 처음 목격한 이들의 대부분은 인상을 찌푸릴 수도 있으나 그중 상당 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솔직한 그의 표현과 구도에 감탄하고 만다.


이러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절대로 강압적일 수 없다. 철저히 자발적이어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도 혹은 이러한 자신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연민은 부드러운 강압적 방식이다. 연민을 가지지 못한 자는 비난받는다. 그는 강요된 연민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가장 잔인한 처우는 그들을 연민으로 대하는 것이다. 중세인들은 우리에게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했다. 관 속에 누워있는 해골이 말한다. "나는 한때 너였으며, 너는 언젠가 나와 같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선 역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잠재적 모습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받고 있는 혜택이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잊지 않게 된다. 


불쾌함의 역할

새로운 미학적 이해는 전통적 미학적 관점인 '쾌'를 거부한다. 이러한 미학은 '불쾌'를 긍정하는데 그것의 이유에 대한 주목을 이끌어낸다. 


<”저는 이 집과 가족을 지배하는 불쾌한 관계를 고려하여” – 여기서 그는 바닥에다 감히 침을 뱉었다 – “제 방을 당장 해약하겠습니다. … 그는 침묵했고 뭔가를 기대하듯이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친구들이 바로 말을 이었다. “우리 또한 당장 방을 해약하겠습니다.”>


세 신사는 그들이 머무는 그레고르 집 안에서 생겨난 '불쾌함'을 발견한다. 그들에게 '불쾌함'은 피해야 할 더러운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들의 등장과 퇴장은 이러한 '불쾌함'을 탈은폐시킨다는 근본적 해결의 시작으로 작용한다. 그들을 통해 그레고르의 가족들은 그들이 느끼는 감정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막연한 '불안함'을 눈앞으로 가져온다. 


도덕과 책임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변신 이후 쉬쉬하던 감정을 폭발시킨다. 시작은 여동생 그레테이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혹시 두 분이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 해도 제가 알아요. 저는 이 괴물을 오빠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요. 제가 오로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여기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 괴물을 돌보고 참아오면서 인간으로서 가능한 모든 일을 다 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어느 누구도 절대 우리를 비난할 수 없어요.>


그레테가 주장하는 바는 '상황 파악'이다. 그녀의 분석이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말로 그녀와 가족이 비난을 받아야 할까? 가족 구성원 가운데 한 명이 빈사상태에 빠졌다고 생각해 보자. 식물인간 상태 혹은 뇌사 판정을 받은 경우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식물인간은 대뇌 일부에 문제가 생겨 의식을 회복할 수는 없지만 기능적으로 자발적 작동이 가능한 상태이다. 하지만 뇌사 상태는 뇌 전체의 문제로 자발적 생존이 불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뇌사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망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식물인간의 경우는 복잡하다. 언제 환자가 깨어날지 모르는 상황. 운이 좋으면 몇 개월 만에 운이 나쁘면 몇십 년을 기다려야 하는지 모른다. 그레테가 말하는 '인간으로서 가능한 모든 일'이 정말로 그러한 지에 대한 평가는 온전히 그들의 몫이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힘들게 일을 해야만 한다면, 어느 누구도 집에서 이러한 영원한 고통을 견뎌낼 수 없을 거예요. 저도 더 이상 못하겠어요.” … 그녀는 어머니의 얼굴에 떨어진 눈물을 기계적인 손동작으로 훔쳤다.>


그레테는 가장 먼저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 사람이다. 누구나 '더 이상 못하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나 도덕적 비난이 두려워서 그 말을 못 꺼낼 것이다. 이것이 도덕의 구속력이다. 도덕의 가장 강력한 구속은 내면의 단속이기 때문이다. 이 내면의 구속력은 매우 강력해서 실행 이후에는 죄책감이라는 것을 불러일으켜 한번 저지른 일에 대한 고통을 영원히 지속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반성적 마음가짐을 '선의지'라고 부른다. 이것은 마치 기계에 코딩된 프로그램과 같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자동적 반응으로 죄책감은 즉각적으로 우리 전체를 감싸 돈다. 그녀의 '기계적인 손동작'은 일말의 예의이다. 다시 말해 기계적 반응과 같은 코드화된 문화적 무조건 반사이다.


<”그가 우리를 이해한다면. … 그가 우리를 이해한다면.” … 그렇다면 아마도 그에게 양해를 구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렇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해요!” 여동생은 소리쳤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에요, 아버지. 아버지도 이것이 그레고르라는 생각을 떨쳐버려야만 해요. … 그가 그레고르라면, 그와 같은 괴물과 인간이 함께 산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스스로 나갔을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오빠가 없지만 계속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고 그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텐데요.>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책임을 그레고르에게 돌리려 하고 있다. "그가 우리를 이해한다면"이라는 말은 자신의 결정에 대한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다. 그레테의 말처럼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결정은 우리의 몫이고 결정 그 자체가 우리의 책임이다. 책임은 responsibiliy (독일어로는 Verantwortung)으로 respond (Antwort), 즉 대답한다는 의미이다. 대답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이다. 그레테의 말처럼 그레고르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는 방법은 그들이 알고 있는 그레고르로 대해주었을 때 가능하다. '쟤 왜 저래?'의 마음으로는 그에 대한 기억은 모두 왜곡되고 오염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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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의 마지막 장은 그레고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로 시작합니다. 다음 주에 마지막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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