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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l 21. 2024

카프카의 <변신> #14

끝과 시작에 대한 이야기

줄거리

방 안으로 물러난 그레고르는 이제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죽음의 과정에서 줄어드는 고통에서 자신이 사라짐을 느낀다. 가정부는 그레고르의 몸에 빗자루를 뻗어 그의 죽음을 확인한다. 그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강요했거나 가능케 했다. 이제 그레고르가 없는 세 가족은 그의 부재 대신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이야기를 채워가는데…


아토포스와 죽음의 수용

공동체에서의 쓸모를 다한 그레고르의 사회적 죽음에 대한 선고는 그레고르 본인의 수용으로 완결된다. 암묵적으로 그의 죽음은 모두에게 받아들여졌으나 그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까지 모두들 짐짓 그렇지 않은 척하는 연기를 한다. 이 연극이 길이질수록 그들의 본심은 마음 저편에서 불쑥불쑥 터져 나오기 마련이고 그레고르가 살고자 하는 절박함을 보일 때 그들은 더욱 잔인해져 간다. 그레고르의 죽음에 대한 수용은 그들의 냉혹한 시선에 대해 스스로 익숙해졌을 때, 그들이 그레고르에게 가하는 공격에 그가 스스로 무뎌졌을 때 비로소 끝이 난다.


<하지만 그레고르는 어느 누구도, 더욱이 여동생을 무섭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단지 방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뿐이다. 그러한 행동은 물론 눈에 띄었다. 그는 통증을 느끼며 힘겹게 몸을 돌리느라 매번 머리를 들었다 바닥에 쳤다. 그는 멈춰 서서 둘러보았다. 모두가 그의 선한 의도를 인식한 듯했다. 단지 잠시 동안의 공포만 있었다.>


그레고르의 본심과는 상관없이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다른 이들에게는 예측불가능한 사건에 불과하다. 그의 절실한 행동은 그들에게는 공포로 인식될 뿐이고, 그가 멈춰 섰을 때 비로소 그들은 그를 위협적이지 않다고 느낀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레고르의 선한 의도는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는 순간에만 인식된다. 이제 그레고르에게 허용된 것은 완전한 격리뿐이다. 그는 이제 그의 집에서도 공동체에서도 자리를 잃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이 힘껏 닫혔고 잠겼다. 그는 감금되었다. … “드디어!” 그녀가 자물쇠에 열쇠를 돌리면서 부모님에게 외쳤다. “그럼 이제는?” 그레고르는 스스로에게 묻고 어둠 속을 둘러보았다. … 그는 지금까지 가느다란 다리로 계속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이 기적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상당히 편안함을 느꼈다. 물론 몸 전체가 고통스러웠지만 이러한 고통들이 점차 더 약해지면서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의 감금, 혹은 격리는 가족들에게는 안전을 의미하고 그레고르에게는 사회를 떠난 홀로 됨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땅을 잃은 자', 즉 atopos의 인간이 되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아토포스(atopos)라고 부른다. 아가톤의 초대를 받은 소크라테스가 그의 집 앞까지 와서 들어오고 싶어 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그의 '습관'이라 말한다. 그리고 "때때로 그는 우연히 있던 곳으로 가서 멈추기도 합니다."와 같은 문장처럼 사회적 관습이 아닌 자신만의 관습을 따르는 행태를 보인다. 아토포스는 사회의 일부이지만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자를 뜻한다. 그들에게는 부여된 지위가 없으며 소위 '사회부적응자'로 불린다.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 (1961)에서 소위 광인이라 불리는 비이성의 인간이 중세에는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았으나 계몽주의와 근대를 겪으며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레고르의 감금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사회적 동물'(zoon politikon)으로서의 인간에게 몫을 빼앗는 것, 즉 정치적 지위가 배제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레고르에게는 이제 자기 결정권이 상실되었다.


금치산자가 되어버린 그레고르의 정치적 배제는 가족들에게는 "드디어!" 해결한 비이성적 목소리의 제거이다. 동시에 그레고르에게는 "그럼 이제는?" 자신의 권리를 지킬 방법은 더 이상 공동체 안에는 없다. 공동체의 썩어버린 아픈 부분을 제거하는 일은 공동체 전체에 고통을 안겨줬지만 외과적 수술을 통해 공동체의 완전한 건강을 회복을 이끌어냈다. 이제 공동체 내에서 그를 위한 '장소 없음'(atopos)이 공언되었다.


정화작업

주검이 된 그레고르의 육체는 공적인 확인절차를 필요로 한다. 공공영역에서의 죽음 인증과정과 사적영역에서의 죽음 인증과정은 각기 다른 형식을 취한다. 사적영역에서의 그것은 애도의 절차를 거치는 반면 공적영역에서의 그것은 처리의 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녀가 우연히 긴 빗자루를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문 앞에서 서서 빗자루를 뻗어 그레고르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 잠시 후 가정부는 침실의 문을 열어젖힌 채 어둠 속으로 크게 외쳤다. “이것 좀 보세요! 그가 뒈졌어요. 저기에 완전히 뒈져 누워 있어요!”>


그레고르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가정부는 정화의 도구인 빗자루를 이용한다. 빗자루는 더러운 것, 쓸데없는 것을 모으고 처리하기 위한 도구이다. 동시에 상처받고 버림받은 그레고르의 영혼을 씻어주는 정화의 빗자루는 그레고르의 인간성의 종말과 육체적 삶의 끝을 고한다. 이 빗자루를 통해 어둠에 빠진 집안에는 다시 일상적인 평온과 조화의 빛이 비친다.


<하지만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대고 서두르면서 말없이 신사들에게 그레고르의 방으로 오라는 듯 눈짓했다. 그들도 그레고르의 방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방 안에 들어온 그들은 조금은 낡은 윗옷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이제는 아주 밝아진 방 안에 놓인 그레고르의 사체 둘레에 섰다.>


어둠의 방이었던 그레고르의 방은 밝음으로 바뀌고 이 빛의 방에서는 그레고르의 영혼의 구원식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그의 시체 주변에 둘러서서 그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했음을 증명한다. 이 순간 그레고르의 주변에는 세 신사가 위치한다. 그들은 그레고르가 옛 것임을 가족이 스스로 인정하게 했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이 필요함을 자각하게 했으며, 그레고르의 죽음의 순간에 동석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사절단의 의미를 갖는다. 성령을 임하듯 이 방 안에는 빛이 비치며 그레고르를 향한, 동시에 가족을 향한 정화의식을 완결한다.


새로운 시작

장례 절차는 간결하게 마무리되었다.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하루는 새로운 질서의 주인들을 위해 설명되어야 했다. 그레고르의 아버지, 어머지 그리고 여동생은 하루를 쉬기 위해 그레고르에게 양해를 구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새로운 계약을 통해 옛 것과의 이별을 한 상태다. 이제 그들의 양해는 감독, 주문자, 가게 주인에게서 구해야 할 터다. 양해의 이유는 가족들이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레고르라는 경제적 군주로부터 해방되어 각자의 직장 상사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동정과 사랑으로 보답해야 했던 과거의 덕목은 사라지고 새로운 덕목이 그들의 새로운 시작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뒤로 기대어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얘기했다. 각자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봤을 때, 그들의 앞날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셋 다 모두 직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 현재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당연히 집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레고르가 구한 지금의 집보다 더 작고 싸지만, 좀 더 형편에 맞고 실용적인 집을 구할 생각이었다.>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장착해야 하는 덕목은 "형편에 맞고 실용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그들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신의 의지'나 '운명'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내일, 다음 달, 내년의 삶을 결정짓는 것은 그들의 '직장'이다. 그들의 '사회적 쓸모와 역할'이다. 그것이 커지면 집도 커지고 작아지면 집도 작아진다. 바야흐로 '쓸모의 시대'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들이 대화를 하는 동안 잠자 씨와 잠자 부인은 점점 생기가 도는 딸을 보면서, 지난 시간 동안 커다란 근심이 그녀를 창백하게 만들었지만, 그녀가 아주 예쁘고 화사한 여성으로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이제 이 아이를 위해 착실한 남자를 찾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딸이 제일 먼저 일어나서 젊은 몸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꿈이자 멋진 계획에 대한 확인과도 같았다.>


그레테는 꼬치를 벗고 나온 나비와 같이 아름다운 성체가 되었다. 그녀의 탈태를 확인한 부모는 그녀에게 남자를 찾을 시기가 왔음을 깨닫는다. 기대와 밝은 미래를 위한 기지개는 어쩌면 새로운 그레고르를 찾아 나서는 것을 "새로운 꿈이자 멋진 계획"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몸은 가장 '쓸모 있는' 상태가 되었고 그것을 가장 실용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은 '착실한 남자', 새로운 그레고르를 찾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잠자 씨 부부가 그레고르를 통해 안락한 한 때를 보냈다면, 그레테를 통해 또 다른 한 때를 계획하는 멋진 꿈이 실현될 수도 있겠다. 새로운 시작은 대물림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쓸모를 넘어...

<그 누구도 인간에게 인간의 특성들을 부여하지 않는다. 신도, 사회도, 부모도, 조상도, 조신조차도 특성들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에, 그의 천성이 이렇게 저렇다는 것에, 그가 이러한 상황들과 환경 아래에 있다는 것에, 그 누구도 책임이 없다. 그의 숙명은 존재했던 것,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의 숙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의도, 의지, 목적의 결과가 아니다. 그를 '인간의 이상' 또는 '행복의 이상' 또는 '도덕의 이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실현될 수 없다. 그의 본질에 어떤 목적을 전가하고 원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우리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발명하였다. 그러나 현실에는 목적이 없다. 인간은 필연적이다. 인간은 한 조각의 숙명이다. 인간은 전체에 귀속되고, 인간은 전체 안에 존재한다. 우리 존재에게 올바른 방향을 부여하고, 우리 존재를 측량하고, 비교하고, 유죄판결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는 전체에게 올바른 방향을 부여하고, 전체를 측량하고, 비교하고, 유죄판결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더 이상 책임지게 하지 않는다는 것, 존재 양식이 제1원인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러한 사실은 우선 위대한 해방이며, 이와 더불어 생성의 무죄가 복원된다. 지금까지 '신' 관념은 현존하는 것에 대한 최대의 적대였다. 우리는 신을 부정하고, 우리는 신 안에 있는 책임성을 부정한다. 이렇게 우리는 세계를 구원한다.> - 우상의 황혼 中


니체는 '쓸모', 즉 '목적'이라는 철학적 허구를 해체한다. 그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모든 것에 부여된 질서의 와해를 의미한다. 쓸모는 질서의 논리에서 유용하다. 니체는 '신' 혹은 '세계'가 우리에게 부여한 '쓸모'와 '목적' 그리고 '책임'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의 기준에 의해 '변신'하지 않는다. 우리가 '변신'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일 때만 가능하다.


카프카의 <변신>의 주는 충격적인 결말은 그레고르의 죽음이 아닌 그의 죽음을 수용하는 방식에 있다.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그와 그의 가족은 제대로 된 이별의 과정을 겪지 못했다. 그레고르의 노력과 업적을 칭송하고 현재의 상황을 수용하여 이별하는 방식, 그레고르의 '존엄'을 지키는 이별을 그들은 행하지 않았다. 그레고르의 마지막 기억 속에는 그의 죽음을 "드디어!"로 환호하는 가족의 목소리와 쾅하고 닫힌 컴컴한 방바닥만에 남았을지 모른다. 그레고르와 그의 가족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이별을 했어야 했다. 우리의 모든 이별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질 때 온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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