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창희 Sep 29. 2019

지하에 대한 불안이 초래한 비극으로 <기생충> 읽기

이동진과 신형철의 평론을 읽고

<기생충>을 보고 난 후 내가 골똘히 생각했던 것은 타인의 고통이라는 감각을 환기시켜주는 예술의 기능이었다. 그러한 감상을 부족하나마 정리해서 「'기생충'이 환기하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https://www.ajunews.com/view/20190618100052789)이라는 제목으로 『아주경제』에 기고한 바 있다. 이번 주말에 읽은 두 가지 좋은 평론은 내가 그때 느낀 감정을 보다 정확히 알게 해 주었다. 평론이 가진 인식적 가치 중 하나는 아마도 독자가 접한 텍스트를 보고 느낀 감정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구체화 시켜주는 일일 것이다.     



그 두 편의 평론은 최근에『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라는 평론집에 실린 이동진의 「기생충」과 『문학동네』가을호에 실린 신형철의 「정치적 수치심의 발명: 감정의 윤리학을 위한 서설2」이다(아래에서 두 평론을 인용할 때는 따옴표를 치고 각기 필자의 이름을 문장 말미 괄호 안에 명기할 것이다). 독자입장에서 두 편의 평론이 가지는 일차적인 미덕은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가진 계급적 구도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는 데 있다. 기생충의 결말은 기택(송강호 분)이 동익(이선균 분)을 죽이는 것이다. 이 결론만을 과도하게 확대해석하게 되면 이 영화의 갈등 구도를 상층계급과 하층계급로 단순화시킬 위험이 있다. 두 평론은 이 지점에 있어 단호하게 지상, 반지하, 지하의 구도를 명확화한다.     


이동진은 “<기생충>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은 이게 두 가족이 아니라 세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동진, 24쪽)”이라고 밝힌다. 이 세 가족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신형철은 “‘반지하가 지상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지하의 방해를 받다가 일을 그르쳐 결국 지상이 아닌 더 낮은 지하로 추락해 버린 이야기’(신형철, 530쪽)”라고 요약한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의 가족은 지상으로 나갈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동익 가족에게 일자리를 부여받는다. 그렇게 부여 받은 일자리 중 하나는 문광(이정은 분)을 그 자리에서 축출해 냄으로써 가능했던 것인데, 사태가 비극으로 치달은 이유 중 하나는 기택의 가족이 지하에 문광의 남편 근세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문광은 근세(박명훈 분)를 찾으러 오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기택의 가족과 문광의 가족은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이 두 가족의 “싸움이 그토록 가혹한 것은 지하에 대한 공포가 반지하의 세계를 지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동진, 26쪽).”이 때문에 <기생충>이 “촉발하는 정치적 정동은 중간계급의 불안(신형철, 530쪽)인 ”것이다.


그럼 왜 <기생충> 아니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중간계급과 최하층계급의 싸움을 그토록 치열하게 다루는가? 왜 이 두 계급이 연대하는 모습은 아주 드물게만 그려지는 것일까? 현실적으로 이들은 자신이 자리한 위치를 성찰하는 것이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그 자리로 내몬 계급적 구조의 모순을 생각하기 어렵거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행동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윤리의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이동진과 신형철의 평론까지 읽고 나면 <기생충>이 공고한 시스템으로 인해 제한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중간계급과 최하층계급이 분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신형철이 제안하는 윤리적 태도는 수치심이다.      


신형철 평론의 제목이 ‘정치적 수치심의 발명’인 것은 상향적 수치심만이 존재하고 하향적 수치심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향적 수치심을 발명해야 한다고 단순화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이렇게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놓치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신형철은 이렇게 간단하게 수치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더 낮은 계급에 있는 인간만이 상층계급 인간들이 하는 행위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이 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돈을 주는 존재인 상층계급에게 수치심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참아야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감정이다. 하지만 신형철은 “하층계급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오히려 상층계급(신형철, 531쪽)”이라고 일갈한다. 그들은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돈을 받고 일하는 하층계급 없이는 “‘짜파구리’하나 끓일 수 없는 무능력(531쪽)”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층은 하층의 마음을 보거나 들을 필요가 없고, 하층은 상층의 마음을 싫어도 보고 들어야 한다(이동진, 38-39쪽).”         


신형철의 제안을 다시 한 번 위험을 무릅쓰고 단순화해 보면 하향적 수치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 사회에서 어떻게 연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이 가지는 상징적인 설정이지만 기택의 가족이 파멸하게 된 것도 결국 자신보다 아래에 놓여 있는 근세의 처지를 몰랐기 때문이리라.     


신형철이 제안하는 수치심의 윤리는 어떤 면에서 윤리적 극대치처럼 느껴진다. 나의 무지로 인해 비롯된 무감각에 대해 그것까지 감각하라고 요청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내가 <기생충>을 보고 느꼈던 감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좋은 예술은 윤리적 극대치를 상상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런 측면에서“봉준호는 그 무력감이 지배하는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의 폐허에서 다시금 이 세계의 모순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해볼 것을 제안하는 회의론자다(이동진, 44-45쪽).”      

매거진의 이전글 박정민의 존재감: <타짜: 원 아이드 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