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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Jun 22. 2017

남산과 후암동


추억이 서려 있는 서울역 근처


 친구들과 헤어지고 경기도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서울역 앞 버스 승강장으로 향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기계처럼 다니던 통근로였지만 어젯밤엔 어쩐 일인지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어느 라인에 서는지 헷갈리는 것이었다. 두리번두리번 5007번이 어느 라인에 서는지 찾아보았으나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4년 동안 일본에 살면서 이곳에서 지내던 일상을 잊고 있었다. 


 발길을 거두어 옛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빌딩) 왼편을 거슬러 올라 힐튼 호텔로 오르는 경사진 사잇길로 들어섰다. 그 오르막길 왼편으로는 공영주차장이 있어 항상 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무슨 차들이 놓여 있는지 무심히 구경하며 언덕길을 다 올랐다. 


 배낭 가방에 두꺼운 책들이 세 권이나 들어있어 무겁게 느껴졌다. 

 

 

남산 주변과 후암동의 골목길


 힐튼 호텔에 내가 직접 묵은 적은 없지만 예전 대우빌딩이나 연세세브란스빌딩에서 일할 적에 많은 외국 손님들을 그곳에 묵도록 했기 때문에 호텔룸은 수차례 본 적이 있다. 게다가 힐튼 호텔 뒤편 정원은 대우 빌딩에서 일하던 많은 직원들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휴식 공간이었고 나 역시 정이 가는 곳이다. 그래서 마음 같아서는 이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짐을 푼 후 마음 편하게 남산 주변을 산책하고 싶었다. 한 번 정도 비싼 호텔에서의 하룻밤을 지를 수도 있었지만 직장을 그만둔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껴졌다.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발길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터덜터덜 구두를 신고 재킷을 입은 채 걷고 있었지만 다행히 유월 밤의 거리는 그렇게 덥지는 않았다. 


 지역 특성상 유난히 경사진 골목길이 많고, 오래된 건물들이 그 경사로 주변으로 오밀조밀 모여 있는 이 동네의 밤 풍경은 왠지 모를 정겨움과 쓸쓸함이 함께 베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남산으로 오르는 도로 오른쪽 아래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면서 계속해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는 계단길 혹은 내리막길이 보였다. 골목을 비추는 황색 가로등 빛이 어두운 골목 풍경을 차분하고 이쁘장하게 단장시켜 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사진으로 담고 싶어 졌고 찰칵찰칵 밤 풍경들이 메모리 속으로 저장되어 나갔다. 



차분하고 조금은 쓸쓸한 밤 풍경은 누군가를 찾게 한다


 길을 걸으면서 문득 누군가와 차 한 잔 나누며 차분히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에 떠 오르는 얼굴들이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 전화기 연락처를 찾아 이 밤 고요한 신호를 보내 볼까 하는 마음이 스르르 번져 올랐다. 하지만 밤이 너무 늦었다. 누군가를 불러내기에는 그리 편한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까이에 사는 한 친구가 떠 올라 딱 한 번 신호를 울렸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이 시간에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것이 조금 의아했으나 해외 출장이 잦은 친구였기에 어딘가 멀리 갔거나 비행기를 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친구를 만나 차를 한 잔 하며 차분한 나눔을 가지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평일 저녁 그렇게 홀로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감성을 자극하는 밤거리를 걷는 것도 참 뿌듯하고 좋았다. 


 그 밤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 앞에 서 있는 나의 마음이 그래서였을까. 


 마치 오미자의 여러 가지 다른 맛들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처럼 복합적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우러나와 그 순간순간 속에 섞이고 풀리는 시간이었다.  



 건강해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 춥지 않아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유월이니 추울 리 만무했지만.


 고지대에서 내리막길로 접어들면서 스치는 많은 길들이 아름다웠다. 역시 어둠은 원본 사진을 더 이쁘게 만드는 포토샵 기능과 같은 걸 가진 걸까.  


 '한증막'이라고 한자로 쓰인 간판을 지날 때 전화기가 울렸다. 이번 서울 방문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였다. 그 친구도 머나먼 곳에서 잠시 서울에 들어와 있는 중인데 앞으로 내 인생의 2막을 함께 써가게 될 존재이다. 그 밤의 풍요로운 감성과 감정에 젖어 있던 탓인지 친구의 목소리는 특별한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전화 통화를 간단히 마치고 후암동 이곳저곳을 지나 숙대입구역으로 이어지는 길로 내려왔다. 중간중간에 불 꺼진 부동산 사무실 유리창에 붙어 있는 매매/월세/전세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보증금 1000/ 월 60
 보증금 2000/ 월 50
 매매 2억 5천
 전세 1억 7천


 앞으로 만일 우리나라로 다시 들어온다면 집을 구해야 하니 이런 부동산 정보도 자꾸 눈에 걸리는 거였다. 가족들과 함께 살 집을 구하기에는 좀 거리가 있는 정보였다고 생각하면서도 혼자 일도 하고 글을 쓸 공간을 찾는다면 이런 곳에다 방을 하나 얻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노래가 부르고 싶어 졌다. 


 '사랑노래'


  뿌연 가로등 밤안개 젖었구나..

  사는 일에 고달픈 내 빈손

  온통 세상은 비 오는 차창처럼

  흔들리네 삶도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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