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온전한 나 자신이 되는가
알게 되었을 때의 느낌은 매우 현실감이 떨어지고 놀라움이 가득했다
마스크를 끼고 걷는 건 아직 좀 불편하다. 숨을 쉴 때마다 안경에 김이 서린다. 하지만 이제 옷을 얇게 입고 거리에 나와 이 찬란한 봄빛을 안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기나긴 겨울은 끝이 났지만, 그 끝자락을 타고 찾아왔던 불청객 녀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때가 어서 왔으면...
이렇게 글을 쓰다 만 게 한 달이 넘었다. 옷을 얇게 입는 것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 이젠 여름 복장을 하고 다녀도 될 날씨가 되었다. 미세먼지는 적고 하늘은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다 여길 만큼 푸르고 깨끗한 자태를 보여 주고 있다. 얼마나 갈지 모르기에 이 아름다운 하루하루가 더 감동스럽고 소중하다.
요사이 의미 있는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섯 명의 각기 인연이 얽힌 삼사십 대 남자들이 그간의 산발적인 만남을 규칙적인 모임으로 바꾼 것이다. 이 가운데 한 명은 내 친동생이다. 또 한 사람은 매우 특별한 인연이 있는데, 10여 년 전 나와 중국에서 만나 좋은 인연을 맺고 그로부터 몇 년 뒤 우리나라에서 나와 관계없이 나의 친동생과 알게 되었다. 내가 친동생에게 그에 대해 말하거나 연락처를 준 적이 없다. 그저 우연히 한 사람이 두 형제를 각기 다른 나라에서 다른 시기에 알게 되었다. 동생이 이 친구와의 만남에 대해서 처음 말하고, 그가 바로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느낌은 매우 현실감이 떨어지고 놀라움이 가득했다.
제4의 인물은 친동생이 심적으로 거의 바닥에 있을 시절에 영혼의 고갈을 막아 주었던 친구이다. 그런데 이 제4의 남자는 정말 우연히도, 앞서 우리 두 형제를 각각 다른 경로를 통해 알게 된 제3의 남자와 같은 직장 출신이라고 했다. 그러나 제3의 남자와 제4의 남자는 같은 시기에 그 직장을 다니지 않았다. 제3의 남자가 직장을 떠나고 난 이후 제4의 남자가 입사를 했기 때문이다.
제5의 남자는 이 다섯 형제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리다. 네 명의 남자들이 간간히 만남을 하던 몇 년 사이에 이 제5의 남자는 두문불출 연락을 끊고 지냈었다. 그러나 형제들의 꾸준한 연락과 권유로 잠수를 끝내고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다섯 명의 남자들은 모두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래전 청년 성서모임에서 활동한 경험이 공통점이다. 가끔씩 만나 식사를 같이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물론 나쁘지 않지만, 무언가 더 의미 있고 깊은 관계를 위한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몇 달 전에, 미리 정한 주제에 대한 중년 남자들의 수다를 영상으로 담는 유튜브 채널을 기획했었다. 네댓 번인가 시도를 했으나 그 사이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정기적인 만남이 이어지질 못했다.
아직도 코로나의 여파는 끝나지 않았지만, 우리들은 조심스럽게 다시 만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그 만남남은 '성서 읽기와 묵상 그리고 나눔'의 형식으로 잡았다. 일단 이주에 한 번 평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으며, 제3의 형제가 샘플실로 쓰는 아담하고 고요한 공간을 사용하기로 했다.
자신만의 레푸기움, 자신의 탑을 갖는 일은 중요하다. 그곳이 돌집이든 소나무 숲이든 바닷가 외딴곳이든, 주기적으로 찾아가 분산된 감각을 닫고 자신의 영혼에 몰두하는 장소를 갖는 일은. 그것은 떠남이자 도착이다. 그곳에서 당신은 다른 사람이 되기를 멈추고 오로지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자신의 본얼굴을 감추느라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자신의 레푸기움에서는 타인을 위해 표정을 꾸밀 필요가 없으며, 외부의 지나친 소란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고, 당신을 움켜쥐었던 세상의 요구에서 벗어난다. (라틴어에서 레푸기움은 '피난처, 휴식처'의 의미이다. 원래 레푸기움은 빙하기 등 여러 생물 종이 멸종하는 환경에서 동식물이 살아남은 장소를 말한다. 빙하기 때 살아남은 생물들처럼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레푸기움인 것이다.)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중에서
시인 류시화 님은 그동안 그가 펴냈던 많은 책들과 달리, 자신의 어려웠던 이야기들을 에세이집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서 유달리 많이 언급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류시화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적었기에, 풍요로움이나 유복함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던 그의 예전 시절 에피소드가 새로운 안테나를 펴고 그의 글에 더 귀 기울이게 해 주었다. 이미 저명한 시인이자 작가로 자리를 잡은 그를 바라보던 시선은, 거럼뱅이나 다름없던 그의 젊은 시절 혹은 좀 더 나이 든 이전 시절 이야기를 접하고 조금 달라졌다. 속도가 빠르고 경쟁이 조금이라도 치열한 곳에서 그는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마치 자신이 바보가 된 것처럼 느껴졌고, 그런 현대 사회의 흔한 일상이 그에게는 전혀 평화롭게 적용될 수 없었다. 그는 좀 더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누군가와 경쟁하거나 치열함을 다투지 않는 곳이 어울렸다. 누군가는 '고생을 덜 해서, 의지가 약해서'와 같은 의견을 표하며 비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만 말할 수도 없을 거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고, 무엇이 더 중요한가 하는 가치의 문제로 접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의 몇몇 장소들은 시인이 오롯이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레푸기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그는 내면의 자신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명상을 통해 삶에 대해 성찰하고 깊이를 더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충만함으로 그는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사는 보통의 사람들은 공간으로서의 레푸기움을 일상에서 찾는 것이 여간 쉽지 않다. 우선 어딜 가나 사람들이 많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기가 어렵다. 혼자 사는 사람이라면 자기 집에서 만큼은 비교적 온전한 자기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먹고 자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 그 공간에서는 생활의 문제들이 머리나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나약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사이 앞서 이야기한 형제들과의 만남이 정기적으로 바뀌고 있는데 중년으로 접어든 우리들은 그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저 가끔씩 만나 식사를 하고, 술도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고 기쁨이 되는 사이다. 하지만 조금 더 필요했다. 무언가 영적으로 심적으로 서로를 이어 줄 수 있는 계기가 있었으면 했다. 이쯤 되면 무언가 이루고 있어야 할 것 같고, 어느 정도 평화롭고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유지하고 있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각자의 사정은 너무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자신이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 그냥 나약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사람이 이주에 한 번이라는 정기적인 모임을 '성서 읽기와 묵상 그리고 나눔'이라는 형식으로 제안했을 때 다섯 남자들은 조용히 수긍했다. 그때 나는 깨닫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이 형제들이 앞으로 내가 살아갈 때 얼마나 큰 힘이 될 존재들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감싸고 보호하고 지탱해 줄 것인지를.
제3의 형제 회사의 샘플실은 이제 우리의 레푸기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이 다섯 형제들은 나에게 관계적 의미의 레푸기움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