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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Nov 06. 2023

낮추면 높아진다는 말은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다.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였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했다.


 주일 미사를 빼먹고, 매일미사 책을 열어 독서와 복음 말씀을 읽다가 위 내용을 마주치게 되었다. 예수께서 비판했던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행동을 보니 이게 혹시 '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SNS에 사진을 올리고, 글을 올리는 나. 단체 톡방에 내가 올리는 사진, 영상, 문장 정보나 나의 길고 짧은 문자들. 어쩌면 지금 쓰는 이 글마저도 모두 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하는 행동이다.


 사람의 본성일 것이다. 나를 드러내서 남이 나를 알아주고,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욕구. 더 나아가 인정받고 존경심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나 이러한 욕구 없이, 오로지 '신독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감)'의 자세로 산다면 개인의 발전과 성장이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래서 '중용'의 덕이 필요하다. 필요한 것을 지나침 없이 행할 수 있는 자기 다스림.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려서부터 늘 마음속에 품으려 애쓰던 덕목이지만, 평생 쉽게 실현하기 어려웠던 자세이기도 하다. 나는 타고나기를 매우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늘 적극적이고 행동이 앞서는 성향이 있었다. 어쩌면 이런 타고난 성품이 '중용'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올해 대학 입학 30주년을 기념해 전공학과 불문하고 수백 명의 대학 동기들이 모였다. 학교를 다닐 때는 한 번도 마주친 적 없고 교류해 볼 기회가 없었던 학과의 친구들이 1년 동안 수많은 행사와 소모임 등에서 서로 교류할 기회와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수많은 학과의 특성뿐 아니라, 같은 과라도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이 친구들과 만나면서 마음이 맞는 친구, 매력이 넘치는 친구, 왠지 끌리는 친구, 놀라움을 자아내는 친구 등 여러 스타일의 많은 친구들과 짧은 시간 안에 뜨겁게 만났다. 그리고 그 가운데 '친구를 섬기는 친구', '자신을 낮추는 친구', '능력이 있지만 소박하게 구는 친구'를 만날 수 있었는데, 쉰이 되어가는 나에게 다시 각성과 가르침의 시간을 주었다.


 실로 그러하다. 사람이 그러하다. 자신을 낮추는 행위는 자신을 낮은 위치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안으로 여물어 있고, 꽉 차 있는 사람이 소탈하고 꾸밈없이 굴 때의 인간미와 매력, 아! 이거 치명적이다. 나도 가끔 의도적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낮추어 보이는 때가 있다. 이것은 수양을 거친 겸손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태도로 사람을 대할 때,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부드러워지고, 상대는 나에 대한 경계가 더 풀어지는 경험을 많이 하곤 했다.


 지금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기분이 좋아지는 얼굴이다. 그 가운데는 반대로 자신을 높이는 이의 얼굴도 있다. 그러나 그건 위트와 유머라 더 유쾌하다. 나는 과연 친구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생각되고 있을까. 앞으로 또 30년을 함께 할 친구들에게 나는 또 어떤 친구로 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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