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 이론
이제 겨우 11일 지났다. 갓 100일 지난 갓난쟁이가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온 지.
테니스와 노래 그리고 영화/드라마 보기와 글쓰기로 채워졌던 나의 여가 시간은 이제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돌아온 이 꼬마 황제를 위한 모드로 전환되었다. 그것도 깔끔하고 에누리 없이.
아내의 눈에는 다크서클이 퀭하니 자리 잡은 지 오래고 아무 이상 없던 내 허리가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잠은 모자라고 어깨와 팔이 아프다. 테니스로 몇 년을 그리 단련한 몸인데 아기 열흘 안았다고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있다. 누가 보면 엄살왕이라고 놀림받기 딱 좋겠다.
평일에 퇴근을 하면 우선 대충 저녁을 먹고 아내와 둘이서 이 작은 거인의 목욕을 시킨다. 옷을 벗기기 시작하자마자 울음이 터진다. 한 사람이 옷 벗기기를 맡고 다른 한 사람은 노래를 하거나 박수를 치거나 아무튼 괴상한 소리를 지르거나 막춤을 춰서라도 아기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 그래야 감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주파수의 울음소리를 조금이라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무사히 목욕을 마치면 아내가 이 상전을 눕히고 전신 마사지를 시켜 드린다. 피부 자극이 적은 순한 로션도 발라 드린다. 이때 아내로부터 각종 미션을 받는다. 예를 들면, 밀린 설거지 또는 건조대에 널려 있는 옷가지를 걷어 정리하기. 욕조 뒷정리 또는 진공청소기 돌리기.
마사지와 로션 바르기가 끝나면 마지막 160cc로 정확히 맞춘 분유로 마지막 저녁상을 올린다. 예정대로라면 이 마지막 만찬을 끝내고 꼬마 황제께서 침소에 드셔야 한다. 그러나 배불리 다 드시고 나서도 눈이 말똥말똥 도무지 잠들 것 같지 않은 눈빛이 발견되면 아내와 나는 약간 절망한다. 그리고 놀아주기 신공과 안아주기 신공으로 좀 더 시간을 끈다.
언제부터 손을 탔는지 모르지만 그냥 눕혀 놓고 잘 놀았던 그가 자신의 시선을 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볼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엄청나게 큰 목청으로 울어대는 방법으로 말이다. 팔 힘이 약한 아내가 애처로워 나는 작은 황제 안기를 자청한다. 그리고 그의 요청대로 그를 세워 안아 그가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시선으로 즐길 수 있도록 조치한다. 오른쪽 팔로 안았다가 왼쪽 팔로 안았다가 두 팔로 같이 안았다가... 팔에 점점 힘이 빠진다. 도대체 이 벌은 언제까지 서야 하는지 감도 안 온다.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는 나만의 시간이 된다. 아내도 그 시간엔 다른 일을 시키지 않는다. 약 20분 남짓 이어지는 이 시간은 꼬마 황제가 잠들기 전 시간 중에는 가장 안락한 시간이다. 음식물로 더럽혀진 그릇과 접시를 세제로 물로 깨끗이 닦아내며 조명에 반짝반짝 빛나는 식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아, 감탄이 나온다. 깨끗함이란 이렇게도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구나.
혼자 지낼 때는 설거지 따위 빨리 끝내고 다른 일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막상 이 작고도 엄청난 권력자가 아내와 함께 나타난 이후로는 설거지 시간이 참 좋아졌다. 그 전에는 설거지가 그토록 큰 자유를 주고 나만의 명상을 하게 해주는 기능이 있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너무나 상대적인 이 현상에 놀라움을 느끼고 말았다. 특히, 오늘 설거지를 하면서 말이다. 아주 조금은 의도적으로 설거지 속도를 늦추기도 했다. 물로 더 깨끗하게 헹군다는 명분을 가지고 말이다.
아직까지 아내는 설거지 시간이 가지는 이 엄청난 의미를 나처럼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당분간 설거지를 자청하려고 한다.
" 여보, 오늘 저녁 설거지 내가 할게. 깨끗이 잘 해 놓을게. "
아, 나는 지금 남자 여우로 변해가는 중일까...